내 남동생은 키는 작지만 다부지고 눈빛이 매서운 놈이다. 고등학교 시절, 아무리 키가 크고 덩치가 큰 녀석도 내 동생의 주먹 한 방이면 나가떨어졌다고 한다. (이것은 믿거나 말거나~ 내가 직접 본 적은 없기 때문에)
아무튼, 동네 뒷골목 으슥한 곳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나 태우고 싸움질이나 하며 몰려다니는 불량 학생 중 한 명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딸 셋에 아들 하나. 딸들은 하나뿐인 아들을 싫어했다. 창피해했다. 집 안에서도 남동생은 늘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였으니까.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왕이었던 동생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평범한 가장이 되었다.
어느 날, 동생네와 마트를 가기 위해 집 앞 골목에서 동생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길래 쳐다보았더니 멀쑥하게 옷을 차려입은 남녀가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말싸움 끝에 감정이 격해졌는지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남자가 길가에 세워져 있던 라바콘을 들어 여자를 때리는 것이 아닌가.
올케와 나는 너무 놀라고 무서웠지만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올케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남자는 손가락을 들어 나를 똑바로 가리키며
" 신OO! 너 신고하면 나한테 죽는다. 너, 신고하기만 해 봐!!"라고 소리를 질렀다.
어떤 폭력적인 남자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 소름이 돋았다. 누구지??
여기는 우리 집 앞인데 전혀 안전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우리가 겁에 질려 있는 동안, 남자는 여자를 끌고 다른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때 승합차를 타고 나타난 내 동생. 힘만 세고 무식한 내 동생이 나에게 구세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남동생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 남자가 내 이름과 집을 알고 있어서 너무 무섭다고 어쩌면 좋으냐고 하소연을 했다.
동생은 내 말을 듣자마자 눈빛이 변하더니 그 새끼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놈을 찾아 멱살을 잡은 남동생이 말했다.
"야이 씨발놈아. 신OO? 니가 뭔데 남의 누나 이름을 함부로 불려? 누가 누굴 죽여? 씨팔. 너야 말로 나한테 한번 죽어 볼래!! 너 누군지 내가 수소문하면 다 나와!!"
힘없는 여자를 두드려 패고, 나를 협박하던 그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얼굴이 허옇게 질린 그놈은 바짝 졸아 뒷걸음치듯 도망가 버렸다. (더 웃긴 건 매 맞던 여자가 남동생에게 화를 내며 그놈을 따라갔다는 것이다. 에휴)
"에이 씨발! 병신 새끼!"
남동생은 분이 안 풀렸는지 그놈이 도망간 쪽을 향해 침을 꺄악 하고 뱉어 냈다.
"야.. 그러다가 그놈이 앙심을 품고 해코지를 하면 어떻게 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말하자 남동생이 대답했다.
"저런 놈은 그럴 주제도 못 돼. 자기보다 센 사람이 나타나면 졸아서 얼씬도 못 할 놈이야. 그래서 내가 더 무섭게 윽박지른 거야."
아. 아직은 힘의 논리가 통하는 세상이구나.
갑자기 내 남동생이 어찌나 멋지고 듬직해 보이던지. 소심한 우리 신랑은 마누라가 그런 놈한테 욕을 얻어먹어도 눈만 꿈쩍꿈쩍하면서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저 사람 누구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나는 전혀 기억에 없는 사람인데.."
그때 길 건너 사는 아줌마에게 카톡이 왔다. 시끄러운 소리는 나는데 끼어들기는 싫고... 자기 집 담벼락에 붙어 구경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 아줌마를 통해 나는 그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 남자는 동네 토박이인 그 아줌마 신랑의 후배고, 역시 동네 토박이인 나와는 초등학교 동창 사이였다.
3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나는 그 남자의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 한데, 그 남자는 그 짧은 순간에 내 이름과 얼굴까지 기억해 낸 것이다. 그렇게 기억력이 좋은 남자이니 "내 남동생"에 관한 기억도 빨리 떠올랐겠지.
그래서 나는 머저리 같은 내 동창에 대한 걱정은 잊고 마트에 가서 신나게 쇼핑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