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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Oct 03. 2023

일러스트 페어와 찐빵

뜨개질 모임에서 거둔 수확은 비단 뜨개질 뭉치 몇 개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나는 찐빵을 만났는데, 찐빵은 바쁘면서도 틈틈이 좋아하는 한복, 여행, 뜨개질 등 각종 취미에 충실한 '인생의 현재 즐기기 마스터'였다. 찐빵은 직업상 죽음을 자주 봤는데, 내게 난다 긴다 하는 대단한 사람들도 죽음을 목도하면 어쩔 수 없어한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은 현재의 삶을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하튼 그런 찐빵과 내가 서울 일러스트 페어를 갔을 때였다. 일러스트를 그리고 관련 상품을 파는 사람들이 코엑스에서 각종 가게를 모아 하는 곳이었는데, 난 공부에 바빠 미처 존재도 몰랐던 곳인데 다들 어찌 그리 잘 알고 찾아왔는지, 줄이 어마어마했다.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 다 주세요."


찐빵은 취미활동에 거침이 없었다. 나는 찐빵이 물건을 살 때마다 옆에서 구경만 했다. 구경만 해도 즐거웠다. '1번부터 9번까지 다 주세요'라고 말하는 찐빵 옆에 있노라면, 나까지 속이 시원해질 정도였으니까.


한 번은 일러스트를 모은 책을 판매하는 분 앞에 갔는데, 그분은 일본인이었고 현금만 받았으며, 일본인이라 계좌이체가 곤란하다고 했다. 찐빵은 책을 팔락이며 일러스트가 맘에 드는 이유를 몇 가지 말하더니 자리를 뜨기를 망설였다. 이 일러스트들이 마음에 꼭 들어 사지 않으면 안 될 거 같단 것이었다. 한참 고민하다 혹시 페이팔이 안 되냐고 찐빵이 물었다. 일본인 분이 알아보더니 페이팔은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했다. 그렇게 찐빵은 양팔 가득 쌓인 짐에 전리품을 추가했다. 일본인 분과 말이 잘 통하지 않아 한참 걸리고 환율 문제까지 있던 건 물론이었다. 이렇게까지 물건 하나하나에 공을 들여 사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찐빵의 흥겨운 분위기에 힘입어 나도 스티커와 카드를 평소 사는 것보다는 많이 샀지만, 과연 이것들이 쓸모는 있을까 고민도 되었다. 괜히 돈을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찐빵은 그다음에는 한복 행사를 가서 한복을 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용으로 큰 인형을 뜨개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구 소련 국가들이 손재주가 좋다며 전 세계 언어로 된 뜨개질 도안들을 알아보러 다녔다.




시간이 흘러, 아는 지인의 돌잔치에 가게 되었다. 아기 용으로 작은 신발을 샀는데 상자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이 도장이 있으면 전국 어느 매장에서든 교환, 환불이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도장만 보고 그것을 알 수는 없을 거 아닌가. 그래서 그래도 된단 뜻으로 영수증을 넣어 놓으려다, 영수증은 너무 정 없어 보여 급히 주위를 보니 별안간 눈앞이 번쩍했다. 엄청 많은 스티커와 카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서울 일러스트 페어!'


찾아보니 선물용 카드로 쓸 것들이 엄청 많았다. 나는 카드에 스티커를 붙이고 편지를 썼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지인들은 선물에 더해 카드까지 썼단 점에 큰 감동을 받아했다.


그러고 보니, 찐빵을 만나 나도 변했다. 항상 생각만 하고 비싸단 생각에 선뜻 사지 않았던 일본 간식을 사서 먹어보거나, 처음으로 밝은 색감의 수영복을 샀다. 어릴 때는 뭘 사도 비싸, 안 돼 란 생각이 많았다. 집이 가난한 탓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항상 돈이 없어도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통에 무엇이든 계산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소비를 줄이고 부러 상품들에 관심을 안 주는 것이 습관이 됐었다.


그런데 밝은 색상의 수영복을 사니, 수영을 가고 싶어 졌고 어딜 가든 자연스럽게 수영복을 입게 됐다. 다음으로는 수영장이 딸려 있는 곳에 놀러 가게 된다. 일본 간식을 먹다가 인스턴트 오차즈케(녹차에 밥을 말아먹는 일본의 간단한 식사)에 빠져 있다가 심야식당 드라마(비슷한 종류의 간단한 식사들이 많이 나오는 심야의 주점을 다루는 드라마)를 좋아하게 됐다. 남자친구와 매번 드라마를 보며 드라마에 나오는 문어 소시지나 계란말이 등을 준비해서 먹기로 했다.


일러스트 페어에서 사 왔던 큰 일러스트는 아직도 보면 웃음을 주는 우리 집의 중요한 인테리어 소품이 됐다. 그 때문에 나는 점점 인테리어에 관심이 생겨 유명하지 않은 작가들의 그림을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소소한 행복이 하나둘 추가된 셈이다.


이 모든 비용을 합쳐도 생각보다 큰 비용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불행에 빠져있을 때, 가끔 홧김에 소비를 하거나, 병에 골골거리며 치료비나 운동을 위한 비용으로 나간 돈이 더 많았던 거 같을 정도였다.


불행할 때 충동구매하지 않도록, 미리 꾸준히 성실히 행복을 소비해 두는 방법을 배운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는, 삶을 행복히 사는 법을 배운 것이다.


'별 거 안 하고 하루가 갔다'라는 이모티콘을 보내면,

'별 거 없이 사세요'라고 답해주는 찐빵.


역시 행복은 배울 수 있는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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