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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Oct 04. 2023

혼인 계약서를 쓰다

여름, 나와 남자친구는 약혼했다. 그냥 약혼한 것도 아니고 법적으로 민법 제801조에 따른 약혼을 하고자 혼인계약서를 썼다. 혼인을 약속하는 계약서를 쓴 셈이다. 


읽어보자면 처음 부분은 이렇다. "갑"(실명 생략)과 "을"(실명 생략)은 상호 간에 다음과 같이 약혼한다. 제1조 [목적] 본 약혼서는 "갑"과 "을" 간의 혼인신고 및 결혼식 준비 착수에 관한 의무 등을 정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오해 마시라. 이 딱딱한 글은 남자친구가 썼다.


결과적으로 둘은 법적으로 혼인을 약속하며, 부정행위 등이 있을 경우 804조에 따라 약혼해제를, 그 경우 806조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으며 그 손해배상액도 5억 원으로 예정해 놓은 것이 이 계약서의 주요 내용이다. 이 정도면 혼인과 혹시 모를 예외적 경우(?)까지 완벽하게 대비해 놓은 셈이다.


이렇게 꼼꼼히 혼인계약서를 적은 건, 끊임없이 가족이 없는 내 처지를 불안해하는 나를 남자친구가 달래주기 위해서였다. 


그 뒤로 내가 힘들어하거나 불안에 시달릴 때마다 남자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혼인계약서 꺼내 봐!" 참, 믿을만한 사람이다.


계약서 중 일부만 공개


가족이 없다는 건 그간 나의 가장 큰 콤플렉스였다. 그것도 사람들이 딱하게 여길 만한 불우한 사고가 있어서 가족을 잃은 것도 아니었다. 엄마와 아빠는 버젓이 살아 있다. 심지어는 자신들이 나에게 헌신했다고 생각하고 계시기도 한다. 그들은 나를 올바르게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그 이유 하나로 가족들을 등지고 나오는 것이 내심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빠가 숱하게 나에게 폭력을 휘둘렀지만 사람들은 아빠를 내심 애틋하게 여겼다. 힘든 홀아비 처지에 딸을 버리지 않고 건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도 아빠가 밥까지 해주며 나를 키웠던 걸 생각하면 문득 당신도 힘들었겠구나 싶은 때가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가까이 있는 사람을 피 마르게 하는 사람이었다. 항상 술을 마시고 끊임없이 같은 세상에 대한 푸념, 음모론을 늘어놓았고 동의하지 않으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손찌검을 하고 휴대폰을 던지고 유리를 깨고 소주병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까지 꺼내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내게 '아버지를 동정하는 눈길'을 보낸다. 마치 되바라진 딸이 아버지의 은혜를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조금의 손찌검을 흉 삼아 제 효도할 의무를 내팽개친 것처럼. 그 정도는 홀아비가 힘들게 딸을 키우느라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친척들은 아예 이혼 뒤 어미 닮은꼴이 싫어서 때렸을 거라며, 그래도 낳은 아버지를 생각해 용서하라고 나를 압박해 왔다. 엄마도 항상 그래도 얼마나 아빠가 널 키우며 다정해졌냐며 아빠를 용서하라고 당부하고는 했다.


그 정도 힘들게 아이를 키우면 아이를 때려도 되는 걸까? 나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 상담사들도 만나는 사람마다 말이 다르다. 일 년에 심하면 이백 번 꼴로 맞았지만, 아직도 정상적인 가정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헷갈린다. 하지만 문득 지나가는 솜털 난 중학생들을 볼 때, 내가 저 나이 때 얼마나 울고 불며 맞았는지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고 머리털이 쭈뼛 선다. 어떻게 아버지는 자기의 어린 딸을 그토록 때리고 밀어붙였을까 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남는 퍼즐 조각처럼 손안에 남아 뒹군다. 


아버지를 '사람'으로서 용서할 수는 있다. 하지만 도저히 아버지를 '아버지'로 보기가 힘들다. 보통 사람들이 그토록 울며 추억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로는... 차마 포섭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결국 스스로를 '아버지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그런 스스로가 창피했다. 왠지 모르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 부모조차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못난 아이 같이 스스로가 느껴져서..... 심지어 나는 내 인생보다는 다음 세대의 내 자식들을 행복하게 키울 생각만 했던 거 같다.


남자친구를 만나고 그의 자취집에 처음 초대 됐을 때, 그에게서 이상적인 아버지 상을 봤다. 아이를 같이 양육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이상하게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때부터 그에게 올인했다. 다른 무엇도 상관없었다. 함께 아이를 행복하게 키워줄 든든한 아버지가 필요했다. 불행한 어린 시절로 고통받았기에, 내 아이들만큼은 화목한 가정에서 잘 컸으면 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든 상황이 와도 남자친구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아버지에게서 배신당했다는 생각으로 독립 후 사람에 대한 심각한 의심병을 앓았지만, 그러면서도 남자친구랑 만은 헤어졌다 만나길 반복하더라도 그 끈을 놓지 않았다. 남자친구도 그런 내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그 결과 5년의 연애를 했고, 혼인 계약서까지 적었을 정도로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는 관계가 되었다. 

여름. 나는 드디어 가족이 생겼다. 앞으로 적겠지만, 이 여름만큼 행복한 여름은 내 인생에 없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남자친구에게 들었던 좋은 아버지가 될 거 같다는 내 직감에 무슨 근거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냥, 그때 어떤 식으로든 구실을 붙여 믿기만 했으면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늘 약속을 어기는 아버지와 날 헐뜯는 어머니 밑에서 사람에 대한 신뢰를 배우지 못했던 내가 미래 세대의 내 자식을 생각하며 처음으로 누군가를 굳게 이유 없이 믿은 결과가 이토록 좋다는 건, 내 미래의 자식의 선물이 아닐까. '엄마, 다시 사람을 믿어 봐요.' 하고 말해주는. '관계는 원래 그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엄마의 엄마, 아빠한테 배운 의심은 잊어버려요.'라고.


남자친구가 써준 혼인계약서는 아직도 내 방에 있다. 하지만 이제는 제대로 간수도 안 하고 있다. 나는 남자친구를 믿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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