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지나갈수록 나는 천천히 항아리 밑바닥부터 물이 차듯이 조그마한 체력이나마 회복해 가고 있었다. 마음이 평온한 시간의 비중이 늘어났고, 두통도 덜해 점차 드라마나 TV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조금이나마 근육도 붙었다. 믿기지 않지만 조금씩 몸이 회복해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또 느낀 믿기지 않는 변화는, 만성으로 달고 다니던 통증이 사라지자 세상을 느끼는 감각 자체가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그중 제일 신기한 것은 내가 타인의 고통에 더 연민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항상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던 아픔이 사라지자, 주위 사람들이 다시 보였다. 각자의 짐을 지고 최선을 다하여 매일 살고 있었다. 특히 남자친구가 수년동안 날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가 다시금 느껴졌다.
당시 남자친구는 1년 차 변호사로서 훌륭히 회사에 적응하고 있었지만, 지난 세월 공부만 하느라 청춘이 없었단 것을 내심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남자친구를 위해 이벤트를 준비하기로 했다.
그건 바로 남자친구가 평소 좋아하던 스타일대로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스타일 체인지를 한 뒤 남자친구가 퇴근하는 길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서 놀라게 해주는 것이었다. "칵테일 마시러 갈래요?" 같은 대사를 준비해 뒀지만, 물론 민망해서 제대로 하지는 못했다.
'이게 맞나?'
그런데 정작 아나운서들이 주로 다닌다는 숍에 야간 추가 비용까지 지불하며 메이크업과 의상 대여를 위해 방문했을 때, 내게는 기묘한 허탈감이 들었다. 값도 상당히 비싼 데다, 내게는 낯선 화려한 메이크업을 얹고 이 날을 위해 옷핀으로 뒤를 고정해 몸에 쫙 달라붙게 한 새빨간 원피스를 입어 보니 어색함도 어색함이지만 사람들 보기에 낯부끄럽단 생각이 들었다. 이 복장을 하고 거리를 걸어 다닐 생각을 하니 모두들 웬 행사 아니냐고 쳐다볼 거 같다는 두려움이 들 정도였다.
낯선 구두, 낯선 화장, 낯선 붙임머리, 낯선 옷을 입은 채 나는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체크해 보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마침 로펌에서 중요행사가 진행 중이라 늦게 퇴근하는 때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 하나 창피하다고 못할 정도면, 남자친구가 그동안 나한테 해준 건 뭐야.'
그러고 보니 내가 순전히 남의 기쁨을 위해 움직여본 적이 있는가. 이런 근본적인 의문까지 들었다.
나는 용기 내서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도블록 위를 또각거리며 걸어 다녔지만, 오히려 눈에 너무도 띄는 옷차림이라 그런가, 다들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하는 느낌이었다. 높은 구두도 생각보다 걸어 다닐 만했다.
로비에 숨어서 '현재 숨어서 남자친구 기다리는 중'이라고 친구들에게 메신저로 알렸다. 친구들은 저마다 이벤트의 결과가 궁금하다고 야단이었다.
결과는 생각보다 심심했다. 남자친구는 너무 놀라면 오히려 무표정이 되는 편이었다. 처음에는 웬 머리 긴 여자가 있다고만 생각해서 원래 붙임머리를 하기 전의 나는 머리가 짧았으므로 나일 거란 생각은 전혀 못했다고 했다. 그러다 내가 일어나서 인사를 건네자 남자친구는 속으로는 엄청나게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성격상 그럴 때 포커페이스가 되는 남자친구는 전혀 놀란 것 같지 않은 얼굴로 말로만 계속해서 '놀랐다'는 말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뒤 남자친구는 확실히 신이 난 것 같았다. 그는 나와 이곳저곳을 걷고 싶어 했다. 가까운 호텔 뱅크바를 들렀다가, 만실이란 소리에 다른 데로 걸음을 옮겼다. 서점을 들렀다가, 마감 시간이라는 말에 나왔다. 이런 금요일 밤에 갈 곳이라고는 하나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용기 내서 말했다. 나도 딱 한 번밖에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지만……, 오늘 밤에는 왠지 그곳이 제격 같았다.
"우리 홍대 클럽 거리 가자."
"정말?"
"응. 그게 너에게 좋을 거 같아. 지금까지는 네가 아픈 나를 돌봐주면서 어떤 게 내 건강에 좋을 거 같다는 식으로 이끌어줬잖아. 이번에는 내 처방을 따라봐."
"... 응. 정말 감동이다."
우리는 홍대 클럽 거리를 갔다. 고민 끝에 유명한 클럽 앞에 자리를 잡자 한참을 줄을 서고 대기하게 됐다. 뺀찌를 먹을까 아닐까, 두근두근 떨리는 순간이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줄 앞쪽으로 갈 수 있었다. 남자친구가 신분증이 없어 사원증을 내밀었다. 신분증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어느 클럽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결국 근처 이자카야에 자리 잡았지만, 야외의 광경을 구경하는 남자친구의 얼굴이 확연히 밝았다.
"고마워. 정말로. 날 위해 이렇게까지 해 줘서."
그 말에 왠지 슬펐다. 그간 내가 그만큼 그를 위해주지 못했다는 것이 느껴져서였다. 아픈 사람은 자신의 고통이 주는 강한 신호에 온 신경이 쏠리게 된다. 하루 종일, 한 시간마다, 10분마다, 1분마다, 1초마다 고통은 몸을 습격해 온다. 불에 데이는 듯, 때로는 칼에 찔리는 듯, 때로는 내장이 온통 피를 흘리는 듯 아픈 감각이 느껴질 때마다 감각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최대한 다른 생각에 몰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얼마나 주위의 신호를 놓치고 있었을까.
'아프다' '힘들다' '나도 도움이 필요하다' 며 내 주위를 헤매었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미처 몰랐다.
병에서 낫는다는 것은 단지 병이 사라진단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온 세상을 품에 얻는 것을 의미했다. 아픔이 나아질수록 점점 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게 되었고 점점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