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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Oct 01. 2023

롱 보드, 롱롱롱 보드!

운동을 해 보는 게 어때? 내가 아파서 쉰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운동을 하기가 싫었다. 일처럼 무언가를 하는 건 질색이었다. 대번에 산 것은 그 대신 롱보드였다. 예쁜 핑크색 파스텔 톤으로 골랐다.


롱 보드가 뭔가 하면, "강아지는 닥스훈트, 보드는 롱 보드가 귀엽다!"는 나의 의견을 반영해서 구매한 스케이트보드의 한 종류로, 스케이트보드 중 유독 양옆으로 길이가 길어 올라타서 각종 움직임을 할 수 있는 보드이다. 심지어는 그 위에서 춤을 추는 고수들도 존재한다.


어릴 적 스케이트보드가 유행일 때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아쉬움이 어른이 돼서 올라온 것일까. 갑작스럽게 보드를 타고 공기를 쌩쌩 가르며 달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기대하던 롱 보드가 온 첫 날. 나는 롱 보드를 집 주위에서 타다 거듭 넘어지고 말았다. 그제야 강의의 중요성을 깨닫고 유튜브로 초보자 강의를 틀었다.


"롱 보드에 한쪽 발을 올리고, 다른 발로 땅을 차면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푸쉬오프'라고 합니다."


푸쉬오프, 내가 좋아하는 웹툰의 제목이기도 했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있던 사람이 현실로 나오면서 생기는 일을 다룬 만화다. 세상에 비로소 나가게 되는 지금 시기의 나와도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또 다시 동네에서 롱보드를 타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결국 강습을 예약했으나, 두 번째로 걸린 코로나 때문에 취소하게 되었다. 그 뒤로 롱보드는 집안의 장식품이 되었다.


뭐, 이런 일도 있지. 뭐.

꼭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야 하나?




롱보드를 타게 된 건 내가 정신적 고통이 심해 옴싹달싹도 못할 때의 일이었다.

그리도 내게 잘해주는 남자친구도 의심하게 되고, 매순간 설명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이 나를 눌러왔다.

힘든 마음에 예의 그 뜨개질 모임 커뮤니티에 부모에게 학대 받은 경험에 대해 적었는데, 어떤 사람이 쪽지를 보내 왔다. 자신도 부모의 학대를 경험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독립하지 못한 채 창작의 고통(작곡가였다)과 빈곤, 부모의 역기능적 패턴에 맞서싸우며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보내고 있었다. 한 번 내가 우울해서 긴 쪽지를 보내자 그에게서 그보다 더 긴 쪽지가 왔다.


"1. 자신을 의심하지 말 것.

2. 우울함이 찾아오면 바로 롱보드를 들고 밖으로 나갈 것.

3.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의지하지 말 것. .. "


이와 같이 이어진 리스트는 수없이 많은 목차와 항에서, 그의 지난 삶의 분투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하나하나 살아가며 쌓은 삶의 경험을 내게 전수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며, 부모의 학대를 겪은 사람이 나만 있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사람들마다 대처 방법은 달랐다. 때때로 사람들은 나처럼 독립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나처럼 독립하게 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어느 순간 '퓨즈가 끊기듯' 결심이 내려져 짐을 싸들고 다시는 두 번 안 돌아보고 집을 나온 사람들이란 것이다. 그 외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 적어도 가족의 연락망 안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나는 그 작곡가와 많은 쪽지를 나눴다. 어느 순간 그는 모임에서 사라졌다. 멜론 차트를 보며 차트 위를 노리며 이를 득득 갈며 작곡하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비록 글자로만 접한 사람임에도 왠지 이미 어떤 사람인지 알 거 같았고, 친밀감이 들었다. 부모의 학대는 저마다 천차만별이고 그에 대응하는 방법도 수만 가지다. 그럼에도 모든 그 다양한 피해자들의 모습들이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내가 걸었던 수많은 고민의 갈랫길에서 조금만 다른 길을 택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나는 비로소 그들 전부를 이해했다.




내게는 필라테스가 맞았다. 집 가까이 있는 필라테스 강습소에서 다행스럽게도 친절한 선생님을 만나 점점 운동에 적응해 갔다. 몸이 조금씩 좋아져 집을 오르는 언덕길은 한 달음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롱보드를 포기한 건 아니다. 방에도 항상 롱보드가 걸려 있고, 롱보드 관련 강습을 매번 확인한다. 지금도 롱보드를 탈 때면, 간절하고 힘든 순간 내 곁에 쪽지로 있어줬던 그의 존재가 떠오른다. 


언젠가는 꼭 롱보드를 제대로 배워야겠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고맙다는 말을 꼭 그 사람에게 건강한 모습으로 전해줄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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