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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Sep 29. 2023

필리핀 사람들은 화를 내지 않는다

봄, 남자친구와 나는 대뜸 계획도 없이 마닐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나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내심 마닐라가 남자친구를 닮은 도시라고 생각했다. 내 남자친구는 그 외로는 쿼카, 비버, 미국 만화 스티븐 유니버스의 주인공 스티븐을 닮았다. 


남자친구는 내가 아플 때 3년간 내 곁을 지켜 주었으며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고 그 빚을 갚느라 힘들 때는 매 끼니 도시락을 만들어 주었고, 지금도 아버지로부터 날 지켜주고 있는 일등 공신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날 왜 사랑해?"

"그냥."


그런데도 전혀 생색을 내지 않고 둥글둥글한 얼굴로 입술을 올리는 특유의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다.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하와이안 셔츠, 컨트리 송, 경영학 서적을 바리바리 싸들고 필리핀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나는 원피스 한 벌만 챙긴 채였다. 


남자친구는 여행의 반은 시골에서, 반은 도시에서 보내자고 했다. 그래서 여행의 절반은 필리핀의 한 농장에서, 절반은 메트로 마닐라의 화려한 도심지에서 머물렀다. 




남자친구와 내가 머문 필리핀 농장은 꽤 재밌는 곳이었다. 닭과 토끼, 염소 따위가 마구 돌아다니고 들개 10마리 정도가 알아서 자리를 잡고 저들끼리 대장 놀이를 하고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Sir' 'Ma'am' 소리를 들으며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항상 식사는 독채로 되어있는 우리의 오두막 앞까지 배달되었고, 신선한 필리핀 로컬 요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어떤 재료가 좋은지 말하면 그것이 다음 식사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디저트를 부탁하면 한밤중에도 갓 만든 할로할로 같은 디저트가 도착했다.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근처 해변에 가서 흔들거리는 해먹에 앉아 다리를 흔들거나, 풀이 무성한 오두막 안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책을 읽는 데 썼다. 


"이제 자자."

"어, 근데 이거 벌레 아냐?"


문제가 터진 것은 여행지에 도착한 후 삼일 째 되는 날 저녁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위에도, 그 위에도… 으아악! 조심해."

"문 틈 사이로 들어왔나봐. 온 벽을 까맣게 덮었네."

"개미들의 산란철인가보다."


우리는 새까맣게 변한 창과 침대에서 계속 후두둑 떨어지는 개미들을 보며 곤란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급한 대로 내가 한 마리씩 잡아 죽여봤지만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밖으로 나가서 도움을 청하자." 남자친구가 말했다.

"근데 밖이 순 깜깜해." 내가 걱정하며 말하자, 남자친구가 든든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갔다 올게."


남자친구는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플래쉬를 켠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이상한 낑낑 소리가 한참 들려왔다.

남자친구는 직원과 돌아왔다. 직원은 상황을 확인하고 벌레 퇴치 스프레이를 가져오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런데 남자친구에게는 변화가 있었다.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번들거렸다.


"무슨 일 있었어?"

"들개들이 사람에게 덤벼. 처음에는 몇 마리가 덤비더니, 나중에는 걔내 리더 격인 개가 나와서 나랑 일대일을 하려 하더라. 옆의 폐 건축자재를 들고 휘둘러야 했어. 그렇게 해야만 길을 만들 수 있었거든."


낮에는 그토록 한가롭고 태평하게 누워있던 개들이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이곳을 제 영역으로 생각하고 순찰을 돌며, 침입자가 있으면 싸우려 든다고 했다. 그것을 모르고 나간 남자친구는 하마터면 큰 봉변을 당할 뻔한 것이었다.


"위험했던 거 아냐?!" 내가 놀라자, 남자친구가 나를 토닥였다.

"괜찮아. 아무 것도 아냐."

"들개랑 한밤중에 싸우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


남자친구는 날 흘끗 보더니, 예의 그 얼굴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냥 했지."


그 놈의 '그냥'. 남자친구에게 '그냥'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 갔다.

나는 남자친구가 들개 10마리와 싸워 이겼다고 SNS에 이 소식을 전했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 했다.

그 밤은 벌레 없이 푹 잤다. 유독 잠이 단 것도 같았다.




우리 삶의 중요한 일들은 그냥 일어난다.


며칠 뒤 우리는 도시 마닐라로 올라갔다. 마닐라는 깨끗하게 개발되고 고소득층이 주로 이용하는 곳과, 난개발되고 저소득층이 이용하는 곳이 나뉘는데 우리는 이 모든 곳을 접하고 싶었다. 


검색을 해본 내가 걸어다니며 도시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설명을 듣는 투어를 찾아냈다. 덩치 큰 세르비아인 아저씨가 나왔을 때는 조금 무서웠지만, 곧 그가 왜 세르비아에서 은행을 그만두고 이 따뜻한 남부의 도시에 정착하게 됐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이곳에서 살았지만,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싸우는 필리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가 스페인에 식민지배 당했음에도 스페인 국기를 걸어놓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전세계에 이런 나라는 없어요. 이유요? 알 수 없죠. 필리핀 사람들은 그냥 그렇습니다."


그와 함께 카지노, 트럼프 타워, 마카티 따위의 부촌부터 시작해서 빈민가, 파시그 강을 모두 걸어 다녔다. 


노을이 지는 파시그 강변은 아름다웠다.

그 순간 남자친구가 말하는 '그냥'의 뜻을 알 것 같았다.

강변은 이유 없이, 그냥 아름다웠다.

날아다니는 낯선 새 떼와 벌레 떼에도 불구하고 손을 맞잡았다.


또다른 재밌는 일들은 많았지만 여행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면 나는 그 순간을 꼽을 것이다. 


남자친구가 그리도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는 '그냥 사랑한다'는 말의 뜻을 깨달은 순간을. 


그것은 노을이 빨갛듯이, 강이 푸르듯이, 필리핀 사람들이 유쾌하듯이, 그냥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뜻이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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