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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Sep 28. 2023

기억은 겨울 바다에 놓고 오라

"샐리 언니. 그렇게 생각이 복잡하면, 내가 하는 와인 바에 와서 하루 쉬었다 갈래? 숙소도 겸하는 곳인데 바다가 바로 보여. 방도 무료로 하루 내줄게."

친한 동생이 고마운 제안을 해왔다. 

"그러면 하루 가 볼게. 어떻게 하면 돼?"

"1층에 와인 바가 있는데, 알바생이 맞아 줄 거야. 거기서 웰컴 드링크 받고 마시고 올라가면 돼."

그런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친구가 쓰는 알바생의 존재가 화근이었다.


"웰컴 드링크를 이렇게 많이 줘요?"

처음 본 알바생은 유독 정이 많은 편이라, 내게 와인잔의 칠부를 넘을 정도로 많은 와인을 웰컴 드링크랍시고 준 것이었다. 아직 사회에 익숙하지 않을 나이지만 여러 아르바이트를 해서 제법 솜씨는 있는 20대 초반의 키가 매우 큰 아가씨였다. 알바생은 서서 큰 잔을 든 채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보고는 곤란하면 앉아서 잠시 마시고 가도 된다고 했다. 어차피 업장에서 홀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외로워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앉게 된 것이 모든 것의 화근이었다.


바에 앉아 화이트와인을 마시는데, 바에 새 손님이 들어왔다.

전에 시켜놓은 선물 세트를 확인하러 왔다는 나이 많은 아저씨였다. 그가 뒷짐을 지고 걷는데, 왠지 범상치가 않았다. 툭툭 가게에 대해 잘 안다는 듯이 말을 걸며 취조하듯 행동하는 게, 딱 보아도 장사를 해본 분 같았다. 그분이 우리 둘의 술자리에 관심을 보이자 내가 호기롭게 말했다. "선생님도 오셔서 가르침 좀 주시죠!" 그런데 웬일, "그럴까?" 하고 그분이 와서 자리에 앉았다. 알고 보니 그분은 건설사의 사장이었다.


그리고 옆에 앉은 내 친구의 알바생은 스튜어디스 과 출신의 모델 지망생이었다.

갑자기 서해 바다를 앞두고 대단한 모험이라도 시작된 듯한 기분이었다.

하필이면 따게 된 와인도 포트 와인으로 도수가 높았다. 다들 생각보다 얼큰하게 취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 술자리로 친해져 그 후 몇 번이고 만났다. 나이 차이가 나는 셋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음식을 먹고,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적당한 거리감이 있고, 신비하게 바닷가에서 만나 원래라면 이뤄지지 않았을 인연을 이뤘기에 더 하기 쉬운 이야기들이 있다. 각자의 흉금에 쌓인 인생 이야기들이다.


나는 로스쿨을 힘들게 졸업한 사연을 말했고, 로스쿨도 사교육 없이는 힘들더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건설사 사장님은 한쪽 다리를 저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예전에 건설 현장에서 사고가 나, 하반신 마비가 될 뻔했는데 이 정도로 겨우 그쳤다는 것이다. 그마저도 같이 사고를 당한 이들은 죽었다고 했다. 두 번이나 돈을 벌기 위해 중동에 갔었는데 고생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모델 지망생 친구는 수전증이 심해 스튜어디스 과를 나오고도 스튜어디스를 꿈꾸지 못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유롭지 못한 집안 탓에 그녀의 오빠는 명문대 피아노 과를 나오고도 손이 굳지 않는 시기에 적절히 유학을 못 가고 군대를 갔다 오게 되어, 다른 이들과는 달리 뒤처진 커리어를 갖게 되었다.


결국 모두가 상처 투성이었다. 상처 투성이. 난 그것이 좋았다. 서로 부족함 없어 보이려 노력하는 명문대에서는 대부분 누가 더 가족에게 사랑을 받았는지, 누가 더 이번에 멋진 일을 이뤘는지 자랑하느라 야단이었다. 하지만 바다를 앞에 두니 다른 말이 나왔다. 우리는 칼국수를 먹으며, 쌈밥을 먹으며, 빵을 먹으며 이야기했다. 


나는 당시 아직 건강이 좋지 못했다. 몸이 좋지 않아 구겨진듯한 자세에서 겨우 힘써 웃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그 모임을 꾸준히 들렀던 건, 따뜻이 맞아주는 그들의 태도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럴 수 있어. 잠시 멈출 수 있어.' 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은.


하지만 실은 나의 존재도 그들에게 같았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말을 해본다면 어떨까. 아파트나 주식 값이 올랐는지 내렸는지, 이번에 우리 아이가 성적이 어땠는지 따위의 이야기들을 집어치우고 단 하루라도 서로에게 바다와 같이 다가가면 어떨까.


모든 것을 어루만져주고 품어줄 수 있는 바다처럼.

파도가 맨발을 간질일 때를 생각해 보아라. 투명한 물이 포말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멀어지며, 서늘한 기운이 왔다 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토록 즐거워한다. 비록 우리의 상처 난 마음은 그대로라도, 잠시라도 시원한 바람을 쐬면 그것으로 됐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사라진 파도처럼 그들과의 인연은 닿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 점도 좋았다. 간간히 그들을 추억할 때는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한 번 시원하게 바다에 소리를 지르고 온 느낌이었다. 


그 겨울, 영종도에서 나는 바다를 실컷 봤다. 흔히들 인천공항이 있는 곳으로 알고 있고 그곳에 주거지가 있을 것이라곤 잘 상상하지 못하는 곳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바다가 보이는 멋진 카페들과 해물 칼국수집 따위가 즐비한 곳이다. 날아가는 곳인 줄로만 알았던 곳에 헤엄치는 길도 있었던 셈이다. 그곳에서 나는 내 기억 속을 마구 헤엄쳤다.


친구가 제공해 준 숙소도 멋지긴 마찬가지였다. 숙소의 방명록을 펼쳤다. 장난 삼아 늙수그레한 말투로 '인테리어도 참 좋고 점소이(무협소설에서 점원을 이르는 말)도 좋구나' 라고 적으니, 가게에서 점소이가 뭔지 한참 화제가 되고 웃음꽃이 폈다고 나중에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바다를 떠날 때 나는 조금은 더 몸이 강해져 있었다. 쉴 새 없이 고통이 몰아치는 시간을, 바다 덕에 잊을 수 있었다. 


봄을 맞아 나는 함께 사는 남자친구와 성북구로 이삿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겨울 편 후기]

안녕하세요. 이번 편으로 《아파서 삶을 멈췄습니다》의 겨울 편이 끝납니다. 이 브런치북은 올해 제가 쉬게 되며 겪은 자초지종을 담은 것으로 겨울, 봄, 여름, 가을 편 순대로 발행될 예정입니다. 즉 2023년 초부터의 기록인 셈이니, 지금껏 저는 과거 이야기를 써온 셈입니다. 제가 아픈 지는 그보다 훨씬 오래됐고, 고통도 글에 묘사되는 것보다 심각했으므로 진지하게 쓰면 상당히 어두운 이야기일 것 같아 일부러 밝은 에피소드 위주로 책을 엮었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아픈 분들이 글을 읽으며 희망을 가져주셨으면 하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적어도 저는 완치의 과정에 있습니다. 환우 분들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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