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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Sep 26. 2023

대작가보다 나는, 고양이

쉬기 위해 떠난 인천 끝자락의 섬, 영종도. 쉬기로 마음 먹은 후 처음으로 한 일은 그간 미뤄왔던 책,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주파하는 것이었다. 책을 펼 때마다 러시아의 삼형제의 이야기가 숨가쁘게 펼쳐졌다. 매일 영종도의 무인 카페에서 조금씩 책을 읽었다. 두꺼운 책을 합본으로 들고 다니며 책을 조금씩 읽은 건, 모두가 입 모아 칭찬하는 이 고전 명작 소설에 지금 길 잃은 기분인 내게 무언가 삶의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무슨무슨스키, 로 이어지는 복잡한 러시아 이름들 때문에 한참을 고생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떠들어대는지 정신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사람들이 돈과 여자를 가운데 두고 싸우는 모습에 '사람들은 어느 때나 비슷하구나' 라는 감상도 들었다.


힘든 마음에 지난 학부 시절의 지도교수님을 찾아뵈러 진주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그 교수님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 있다 하니 마침 그 교수님도 읽고 있다는 게 아닌가!


책에 대한 토론이라면, 내가 또 빠질 수 없지!

그렇게 신나게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던 찰나, 교수님께서 걱정하며 말씀하셨다.


"자네는 전에는 공부 중독이었는데, 이제는 생각 중독이구만."


무언가에 중독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나 봐.


그 말이 가슴을 쿡 찔렀다.



대학교 3학년 때 교환학생으로 북유럽의 한 대학에 둥지를 틀었다. 학기 중간중간 유럽을 무계획으로 유랑하며 다녔다. 자주 혼자였고, 작은 동네에 많이 들렀으며, 외딴 종교시설 같은 곳들에 무작정 들어가 현지인들과 함께 무릎을 맞대고는 기도하고는 했다. 왜 그리도 간절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유는 알 수 없다. 청춘이란 것이 겉으로는 푸르러 보여도, 속으로는 시뻘겋게 아프게 성장하고 있는 상태여서 그리 했을 것이란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도 없다.


그때 한결 같이 기도했던 첫 마디가 있었다.


부디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나는 내 삶에 의미가 있기를 바랐다. 그냥 흔하고 시시하게 뜨다 지는 별처럼 살다 죽고 싶지는 않았다. 대단한 부, 권력, 명예 같은 것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죽기 직전 의식이 희미해질 때 그래도 '아! 잘 살았다'고 생각할 만한 한 가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오랜 소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무리한 부탁인가. 기도를 듣고 있었을 신들도 곤란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세상에서 제일 갖기 힘든 것을 갖고 싶어한 셈이니까.


심지어 그때 나는 삶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라는 철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삼십대가 되어가는 길목에서, 나는 주위의 수많은 새로운 소식들을 듣게 되었다. 슬픔에 젖어 목숨을 스스로 끊은 사람부터, 군대 가혹행위의 희생자, 유전적 희귀병 발병, 신념의 좌절. 갑작스러운 일들은 많았고 때로는 좋은 쪽으로도 발현됐다. 부모가 손소독제 공장을 하는 친구는 코로나를 맞아 대박이 났고, 평범한 학생인줄 알았던 친구가 부모의 사업을 물려받아 부자가 되기도 했다. 그저그런 일들은 더 많았다. 열심히 매일 그린 만화의 실패, 고시의 실패, 낙향, 하향 취업.


어떤 삶이 의미가 없는 것일까. 어떤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라고 그 답을 알았을까?


나는 또다시 내가 '도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의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나는 어쩌면, 압도되어 온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손쉬운 상징들, 학벌, 학점, 문학상 수상작, 금전, SNS, 브랜드와 같은 것들에 현혹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걸 가지면 내 삶은 그나마 의미가 없진 않을 거야' 라면서 가져온 것들은 그러나 허망한 가짜 유리과자들처럼 내 식도를 상처 입히고 속에 피를 나게 했다.


'이거 알아. 우리 아빠야!'


20년간 맞고 살았다. 그렇게 아버지가 나에게 폭력을 일삼던 이유는 자신이 벤처붐 때 잘 나가던 공기업 과장 자리에서 나와서 차린 사업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좌절감에 아버지는 평생 나에게 분풀이를 하며 살았다. 하지만 뺨을 맞아 의자에서 떨어지는 것보다도, 가끔 소주병으로 위협을 당하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건 아버지의 정신적인 공격이었다. '무언가 되지 못했다'는 한 섞인 소리침이 내 안에서 자꾸 감돌았다. 


가난한 집안에서 공부를 유독 잘했던 아버지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장벽을 뛰어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버지에게는 국가도, 사회도, 이웃도 다 미웠다. 왜냐면 아버지가 '무언가' 되지 못하게 막은 것들이니까.


하지만 무의식중에 나 역시 아버지의 말에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만든 세계관에 갇혀, 아버지가 분류한 대로 세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무언가' 되려고 하고 있었다.


뜨개질하다 만난 친구들이 늘어났다. 그 중 매우 귀여운 언니가 있었다.

언니는 프랑스에서 만화를 그리다 건강 문제로 귀국한 사람이었다. 각종 작업을 하며 철야 작업으로 얻은 지독한 피로와 병은 한참동안이나 언니를 괴롭혔다. 하지만 언니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그림을 그리고 멋진 전시회를 열었다. 언니의 전시회에 초대받았을 때, 뒷풀이에서 언니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손을 꼭 잡았다.


그 언니가 내게 말했다. "널 좀 봐! 조바심에 지쳐 있잖아. 가만히 흘러가게 놔둬 봐."


다음은 언니가 해준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내가 너무 힘들었어서 사실 계속 그 상태였다가는 죽었을 수도 있다. 아님 회복 불가능한 병을 얻어서 일상생활이 불가하거나. 그런데 나는 나의 의지로 또는 나를 아끼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구렁텅이에서 살아서 빠져나왔다. 그래서 나는 고양이를 처음으로 키우는 기쁨도 누려보고,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도 만나서 사귀어 보고, 햇살 비치는 창문 아래서 가을 바람도 느껴보고, 중요하게는 맛있는 연어덮밥도 먹고 일상을 행복하게 채울 수 있는 것들을 만끽하고 있다. 내가 죽었으면 다 못 느꼈을 이런 소소한 행복들을. 샐리도 일단은 이런 것들을 만끽하는 게 어떨까?


아. 그렇다. 답은 도스토예프스키보다는 봄 햇살이 지나가는 창틀을 밟는 고양이의 발자국에 있다.

나는 그제야 생각 중독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의 리스트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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