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내게는 나만의 방이 없었다. 내심 나를 짐으로 생각하는 부모님 밑에서 고모 집, 할머니 집 등을 옮겨 다니며 탁구공처럼 살았다.
좋은 대학, 좋은 로스쿨에 진학하면서 형편이 다른 사람들과 섞이게 되었다. 특히 차이가 나는 지점은 가족이 화목한지 여부였다. 로스쿨에는 기숙사에 벌레 한 마리가 나와도 몇 시간 거리의 엄마를 전화로 불러내는 아이들이 많았다. 심야까지 이어지는 수업이 끝나고 교정으로 나오면 수많은 가족들이 차에 강아지까지 대동하고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내가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왜 집에서 나오려고 하냐고 묻기도 하고, 룸메이트를 구한다고 하니 부모와도 사이가 좋지 않은데 누구와 잘 지낼 수 있겠냐고 진심으로 묻는 동기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누구의 응원도 지지도 없이 스스로 집을 나왔다. 아버지가 로스쿨에 진학한 뒤에는 술과 손찌검을 멈추겠노라 약속했음에도 근처로 이사한 첫날부터 몰래 나가 술을 먹고 왔을 때 이미 나는 결심이 섰다. 캐리어에 짐을 싸서 나오는데 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네가 없이 내가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수만 번 아버지에게 기회를 주었었다 배신을 당한 나였다. 나는 그렇게 로스쿨 입학과 함께 집을 나왔다. 이후 그간 아버지로 인해 쌓인 마음과 몸의 상처로 몇 년을 앓게 된다. 병원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나와 아버지에게 연대책임으로 물린 의료보험 빚도 갚아야 했다. 아이들은 내가 고액 과외를 한다고 수군거렸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나만의 방을 찾아 떠났다.
시간을 빨리 돌려, 2023년 봄으로 와 보자면 상황은 바뀌어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로스쿨을 졸업했고 남자친구는 큰 로펌의 변호사가 되었다. 우리는 결혼을 약속하고 함께 살고 있었다.
남자친구와 성북구로 이사를 온 다음 날(당일은 힘이 들어서 둘 다 자느라 바빴다)이었다. 남자친구는 새하얀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이 방들을 네 생각 나는 대로 꾸며 봐."
"어, 정말?"
"응. 네 취향대로 마음껏 꾸며 봐!"
생각해 보니 어릴 때부터 집 안의 물건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미국 드라마에 나오곤 하는 10대 청소년들의 엉망진창의 방이 부러웠다. 좋아하는 락스타의 포스터조차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다.
"고마워."
왠지 눈물이 났다. 너무 행복해져서 순간 덜컥 의심과 불안이 샘솟을 정도였다.
좌식으로 할지, 입식으로 할지, 작은 체스 테이블을 놓을지, 톤은 주로 어떤 톤으로 잡을지 얘기하며 나는 서서히 집에 대한 구상을 갖춰갔다.
집은 다른 점은 다 좋았지만, 위치가 꼭대기 언덕 위란 것이 문제였다. 때로 나는 언덕 앞에서 지쳐서 멈춰 서고는 했다. 아직 몸도 그리 편치 않을 때였다. 다른 사람들이 쑥쑥 올라가고 내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 몸에 대한 원망도 해 보면서, 그렇게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문득 생각나는 분홍색 색감. 하얀 해먹과 선인장 화분. 조용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내 영웅 같은 밴드들.
내가 꾸며놓은 집의 분위기를 떠올리자 힘이 났다.
'그렇구나. 집에 들어갈 때는 이렇게 달콤한 기분이 드는 거구나. 원래.'
집에 들어가기 몇 걸음 전.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그 순간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기 몇 걸음 전, 지친 언덕길 끝 휴식을 고대하는 행복한 마음가짐일 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