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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Oct 07. 2023

스마트폰 없이 혼자 경주 여행

병이 내 삶에 미친 영향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단연 싫은 것이라면 통증을 버텨내느라 생긴 스마트폰 중독일 것이다.


나는 2016년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2017년부터는 때때로 운신이 힘들었고, 2019년부터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그럼에도 로스쿨 학업을 강행한 끝에 졸업은 해냈지만,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특히 2019년, 아버지의 주취폭력을 견디다 못해 의절 선언을 하고 나온 뒤로는,

심신이 다 아팠다.


"도저히 혼자 있지 못하겠어요."


장학회 사무국장님께 울며 전화하던 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당시 나는 좁은 원룸에서 하루종일 병상에 누워 있었다. 공부를 하는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일과가 없었다.

더욱이 일분일초 통증이 내 몸을 갉아들어오는 것이 느껴지는 상태였다. 흰 원룸벽과 나만 오롯이 있는 시간이었다. 외로웠다.


당시는 하필이면 스마트폰의 부흥기와 맞물려 있었다. 나는 고통을 잊기 위해 귀여운 동물이 나오는 유튜브 따위를 하루종일 시청했다. 그러다가 남자친구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면, 그제야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스마트폰에 마음 한편으로 고마움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몸의 아픔이 가실수록, 이렇게 계속 중독된 채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과 올해 늦여름에 나는 경주로 혼자 여행을 떠나게 됐다. 그것도 스마트폰 없이! 

이른바 디지털 디톡스 여행이었다.


숙소는 경주 시내와 조금 거리가 있는 곳으로 잡아두었다. 도시와 가까워 혼자 뚜벅이 여행을 하기에 편리하되, 주위에 아무것도 없이 고요해서 쉴 때는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는 조식 무료, 객실 내 스파 무제한이었다.


그럼에도 KTX를 타고 도착한 첫날은 못 견디게 심심했다. 내심 우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눈부신 경주의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낯선 지역에서 홀로 스마트폰도 없이 걸어 다니려니 고역이기도 했다.


콘텐츠 중독에 시달리던 나는 시내 서점에서 책 2권을 사서 와 우악스럽게 읽어버렸다.

그런데 조금씩 햇살에 비치는 경주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스마트폰과 고통이 사라지자 점점 의식의 속도가 정상을 되찾기 시작했다.


둘째 날, 시내 자판기에서 재활용 필름 카메라를 샀다. 카메라에는 36장의 사진밖에 담을 수 없었다.

그러자 한 장 한 장이 신중해졌다. 고분을 찍었고, 주위에서 하는 풍물놀이를 찍었고, 기념 삼아 카메라 자판기를 찍었다. 점차 순간을 음미할 줄 알게 되었다.


근처를 걷다 국제펜대회를 기념해 만들었다는 작은 도서관인 문정헌에 들렀다. 현대식 한옥에, 음료는 2000원 남짓, 읽을만한 책이 많은 천국이었다. 

그곳에서 조금씩 마음이 평온해지고 예전에 책과 글자를 사랑하던 내 마음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로스쿨에 들어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고통받기 전, 내가 얼마나 순수하게 책을 사랑했는가가 기억났다.


셋째 날, 감포 바다에 갔다.

수협활어직판장에 가서 1층에서 경주 특산물이라는 참가자미회를 시키고 2층 초장집에 올라가

바닷가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으니, 전망대가 따로 없었다.


쫄깃한 참가자미회(나는 뼈째회로 떴다)의 맛도 그만이었다.

그 순간, 문득 나는 중독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순간이 비참하니 도망치고 싶어 무언가에 중독됐던 거지, 

지금 이 순간이 충분히 아름다우니 스마트폰 없이도 충분하구나.'


그간 항상 마음이 비참했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 나이가 되어 쓰기 이제는 부끄럽기도 하지만, 법률가가 되는 것이 곧바로 인권을 위한 일이라 착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법률가가 되는 것이 인권을 위한 것이 아니란 건 아니지만, 인권이 생각보다 복잡하단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로스쿨에서 학업 내내 절망이 나를 뒤 따라다녔었다. 


우선 인권이란 개념 자체가 실정법에 없음은 물론, 그나마 헌법상 기본권이 비슷한 개념이겠지만 이마저도 제한이 가능하다는 것이 법률상의 상식이다. 법률은 어느 때고 '형량'을 요구했다. 법의 여신이 들고 있는 저울처럼, 한쪽에 소중한 걸 쏟으면 다른 쪽은 위로 끌려 올라가 버리고 만다.


긴 시간 동안 가족에 의한 폭력을 경험하면서, 법의 사각지대를 익히 경험했다. 그래서 사각지대의 등불 같은 법률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로스쿨에 오고 나서 읽어 보니 아동복지법 체계가 대단히 부족하다곤 할 수 없었다. 


현장을 출동하는 경찰관 등이 가족 간의 폭력은 범죄화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어 문제가 좌시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그들에게 가족 간의 폭력을 전부 송치하고 사건화하라고 명한다고 해서 사태가 나아지는 건 아니다. 왜냐면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가족 간의 폭력은 다른 사인 간의 폭력과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만의 정의감을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걸 현실을 맞부닥치며 배웠다. 예전에는 내심 마음 한편으로, 사람들이 왜 정의를 외면하는지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내 정의만을 보편적 정의로 착각하고, 왜 이 나라가 가정폭력을 외면하는지를 계속 생각했고 절망했다. 경찰서로 쳐들어가 현실을 바꾸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법률가가 된다면 가정폭력과 개인적으로는 싸워나갈 생각이다. 하지만 그걸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단 걸 알았다. 그러자 오히려 묘한 해방감이 마음속에 찾아왔다. 내가 버림받은 모든 아이들을 책임질 필요도, 책임질 수도 없다는 것을 알자 나만의 묵묵한 작은 싸움을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몸이 회복해가고 있는 것도 좋은 신호였다. 어쨌거나 그 모든 고통은 나를 죽이지 못했고,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나를 다독이자. 어차피 나만큼 가정폭력에 진심인 사람도 드물 텐데, 앞으로 적어도 한 명은 구하게 될 몸인데 미리 칭찬해 주자고.'


로스쿨을 다니는 내내 독립으로 인한 심신의 고통과 빚을 처리하느라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 내게 내심 수치심도 있었지만, 이제야 살아남은 나 자신을 칭찬해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중 읽은 책이 스스로에게 다정할 것을 신신당부하는 것에 마음이 이끌렸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경주 여행이 너무 좋아서.


신기하게 굳게 결심을 다지고 나자, 우울도 온데간데없이 잦아들었다. 


마지막 밤에는 숙소 사장님이 일대일로 바베큐를 해주셨다. 닭고기와 삼겹살을 굽고 신 김치와 밥을 먹었다. 술을 안 먹겠다는 날 위해 사장님은 오렌지 주스를 가져왔다. 펜션 일의 고충에 대해 듣고 나니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했다. 모든 사람들이 간절하게 살고 있었다. 


언제 한 번 은인 같았던 심리 상담사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다 : 모든 사람은 그 순간 최선을 다해서 산다고.


통증 속에서 어리바리한 이상주의를 키워갔던 나도 그 순간 그저 최선을 다한 것인 만큼,

내 숱한 가정폭력 신고를 무시한 경찰들도 그들 가정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가장이었던 걸까.

세상과 나 자신 사이에 비로소 화해의 가교가 놓이는 기분이었다.

숨을 쉬는 것이 아주 조금 더, 편해졌다.


(덧말. 모든 가정폭력 경험자들이 이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저의 가치관에 따라 편해지기 위해 세상을 용서하고자 노력한 결과일 뿐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도 어떤 방식으로든 노력해 세상에 자기 방식대로 나아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내 손에는 스마트폰이 다시는 들릴 일이 없었다, 는 스토리는 아니다.

하지만 여행 전보다 확실히 나는 절제력이 늘어나 있었다.

그 바탕에는 중독에 대해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세상과 내가 화해해 나가는 길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가 놓여 있었다.


나는 밤바람을 맞으며 경주의 숙소에서 연습장에 글을 썼고,

그 글들이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하나씩 올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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