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흘러 가을이 되었다. 처음에는 하루를 쉬는 것도 힘들고 초조하기만 했던 내가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을 쉰 것이다. 어느 날 내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 귀엽지 않아?"
그동안은 나 자신이 싫었다. 아팠던 건 불가항력임에도 내심 스스로를 원망하는 내가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병치레를 하는 나를 외면하고, 내심 원망했던 것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경쟁사회에서 '쓸모없게' 된 거 같았고, 그런 나를 내심 나도 외면하게 되었었다.
그런데 쉬면서 생각해 보니 왜 스스로를 쓸모로만 생각했는지가 의문이었다. 나아가 쓸모란 건 다양한 것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1인분 하고 있는 거예요' 누군가가 말해주었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안다는 것만으로도 너는 그 사람과 달라.' 늘 아버지를 닮게 될까 무서워하는 내게 남자친구는 말해주곤 했다.
항상 자리에 누워 스마트폰 따위만 하고 있던 아버지가 무서웠고, 무서운 만큼 닮기 싫었다.
사회에서 뒤처졌다는 이유로 평생 분노를 불태운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면, 사회에서 앞서나가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뒤처졌던 지난 병치레의 시절에도, 나는 고통 속에 없어진 마음의 여유 속에서도 억지로라도 타인의 고통을 생각하고자 노력하고 기도를 올리던 사람이었다. 그 마음을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내가 아무 공부도 못할 때도 내 곁에 남아주고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그제야 지난 시절의 내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왜 아직 걔랑 연락을 하고 있어? 걔는 안 될 애야. 놔줘."
소년범 국선보조인 공익활동을 한 후 그 아이와 계속 연락을 하고 있다 하자, 아는 로스쿨 동기 오빠는 가볍게 나를 채근했었다.
"범죄 프로그램은 못 보겠더라. 피해자 유족들 보면 가슴이 아파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래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이상하게 보고는 했다. 왜 그리 혼자 진지하냐고.
"난 지금껏 알아온 부고 소식에는 다 참여했는데, 이번에 참여 안 하면 내 안의 평등 원칙이 깨진다고."
로스쿨 지도교수님의 부친상에 갈 때도, 동기는 나를 이상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 아이와 연락을 계속하고 도와주려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아동인권 변호사님과 연락이 닿고,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었다. 내 안의 능력과 한계를 느끼는 경험이 된 건 물론이다.
내 진지함과 진정성은, 때때로 비웃음을 받기도 했지만, 직접 산 디저트를 들고 (장례식을 겪어본 입장에서 디저트를 사 오는 사람이 제일 반가웠다. 육개장만 먹기 힘들기 때문.) 지도교수님의 부친상을 방문한 결과 나중에 그 교수님의 나름의 '아픈 손가락'이 되어 공부를 신경 써주시는 등 총애를 받았다. 이것이 졸업시험 중 민법이 과락되었을 때도 졸업을 허가해 주는 데 등 이것저것에 도움이 됐으리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무엇보다 열심히 산 나 자신이 기특하고 대견했다.
밥을 굶어서 인턴으로 나간 로펌 구내식당에서 음식을 집에 포장해 가고, 장학금을 얻지 못해 백방팔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니던 내가 시간을 지나 생각해 보니 나 스스로 고마웠다. 지독하게 아팠음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한 번 더, 한 번 더 용기를 내던 나 자신이 고마웠다.
그 모습은 사회에서 보기에, 몇몇 사람들이 보기에, 도태된 사람처럼 보였을지는 몰라도
내가 느끼기에는 귀엽고 신성한 종류의 것이었다.
흑암 속에 있어야만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다.
아무리 힘들 때도 기도를 놓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나 자신을,
발견했기에 이제 앞으로의 험한 길도 갈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다시 드렸다.
"염치없지만 다시 기도드립니다. 아플 때 낫게 해 주신 것만으로도 기적인 걸 앎에도 제 타고난 영혼의 모양이 까다로워 이렇게 다시 기도드립니다. 저는 세상 밖에 아직도 가정폭력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아이들이 있단 것만 생각하면 괴로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도울 수 있는 변호사가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이렇게 저를 만든 건 신이시니 책임져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