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 없었어
한 달 전 회사에 휴직을 신청했다. 퇴사를 하고 싶었으나 대책 없이 회사를 때려치울 나이는 아니라서, 안전망 장치를 해두기로 했다. 휴직한다고 받아주는 회사가 있냐고들 하지만, 미국은 고용인이 법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어러 가지 혜택이 있다.
한국처럼 똑같은 기간에 휴가를 가지 않아도 되고,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정시에 퇴근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 회식이나 근무 시간 이외의 모임에 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있고, 누구도 오지 못하는 이유 같은 건 묻지 않는다. 휴가나 병가가 필요할 때도 상사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으며, 시스템에 주어진 휴가를 신청해서 쓰면 된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역시 미국은 달라~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그에 따르는 책임이 존재한다.
휴직을 남겨둔 일주일 전쯤 매니저에게 이메일을 받았다. 떠나기 전까지 나에게 남은 over due tasks 175개를 처리하라고 가라는… 참고로 1년 전 새로운 팀으로 왔을 때 내가 넘겨받은 tasks는 400개였다. 처음에는 이 전 팀에서처럼 열심히 하면, 퇴근할 때 그날의 task를 0으로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6개월 뒤 tasks를 150개까지 만들었지만, 그 6개월 사이에 내가 화장실에 간 숫자를 셀 수 있을 정도로, 말 그대로 죽어라 일을 했다.
그러다가 문뜩, 알게 되었다. 다음 날이 되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새로운 일들이 그 숫자를 채워나간다는 것을… 절대로 0이 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자다가 깨면 나는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과 출근하자마자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다시 잠을 잘 수 없었고, 이 불면의 밤에 회사 일을 생각하느라 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에 너무 화가 났다.
마지막 날, 사무실을 나오기 15분 전까지 재판을 앞두고 있는 케이스를 정리하면서 내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늘은 예보대로 비가 내렸다. 현실이 부정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문제가 도망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상황과 사건은 나를 배려하면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 사이 새롭게 지원한 회사에서 3번째 단계인 전화 인터뷰가 잡혀 있는 날이었다. 미국은 회사마다 다르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곳이라면 몇 단계에 걸쳐 직원을 고용하는데, 첫 번째는 온라인 웹사이트를 통해 이력서와 신청서를 보낸다. 두 번째, 비디오 인터뷰를 하는데, 5가지 질문을 주고 답변을 영상으로 녹화해서 올리는 방식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질문을 받았고 어떻게 답변했는지는 나중에 자세히 나누기로 하고, 세 번째 전화 인터뷰, 그리고 다시 사인이 필요한 온라인 신청서와 background check를 위한 서른 가지 정도의 질문에 답변을 하고 나면, 서류에 사인을 해서 보내라고 한다. 그다음 단계가 대면 인터뷰이다. 나는 오늘 4단계까지 마친 셈이다. 아무튼 다락방의 창문 밖에 추적이며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서류를 작성하다 보니 점심때가 지났다.
헤이즈의 노래는 비도 오고 그래서, 니 생각이 났다고 하지만, 나는 비도 오고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쉬기로 했다. 여행까지 가서 방 안에 있을 거면 뭐 하러 여행을 갔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책을 읽고 티브이를 보고 침대에 누워 과자를 먹으며, 나는 온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너무 치열해서 방전되어 버린 나를 조금씩 충전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