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많이 놓고 나왔고, 참 많이도 안고 나왔다.

#_09

by 살짝미친 바나나

항상 그랬다. 아침 점호 시간,

전역자가 전역모자를 쓰고 정자세로 섰다.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하고 외친 뒤,

짧은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내가 저 자리에 서게 되면 무슨 말을 하게 될까’

늘 상상했다.


전역 100일 전, 50일 전,

일주일 전, 하루 전.

하루하루 다가오는데도

이상하게 감정이 벅차지는 않았다.


그토록 기다렸던 전역이었는데,

그냥… 그랬다.


다른 전역자들이 하던 대로,

전날엔 후임들과 시끄럽게 웃고 떠들고,

이건 좋았고 저건 아쉬웠고,

울분 섞인 멍석말이도 실컷 하고.


그렇게, 군대를 떠났다.

ChatGPT Image 2025년 7월 3일 오전 10_17_59.png


돌아보면 진짜 좌충우돌이었다.

부모님 없이 혼자 입대한 날,

“엄마 여기 와주면 안돼?”

하고 전화했던 기억.

입소 신청도 2주 뒤로 해놨다가

부모님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일.


그리고 그렇게,

처음으로 강제로 포기할 수 없는 공간에 갔다.


처음에는 정말 자주 생각했다.

‘그냥 도망가면 안 될까.’

‘집에 가고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초반엔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그래도 그 안에서 무언가가 만들어졌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거기서 하나의 작은 사회를 만들고,

서로 협력하고, 함께 힘들어하고, 같이 웃고.


참, 복작복작하게 살았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사회가 또 있을까 싶다.


밖에서 어떤 일을 했건,

명문대를 나왔건,

이름난 인디밴드의 주인공이었건,

이곳에 처음 오면 누구든 차렷 자세가 어색한

코찔찔이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들여 마신 콧물이

한 바가지 정도 됐을 때,

아니, 들어먹은 욕이 한 바가지가 됐을 때

비로소 1사람 몫을 다하는 사람이 되고,


또 시간이 지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가끔은 누군가의 몫까지 감당하게 된다.


나이가 많든 적든,
여기 들어오면 1살부터 다시 시작하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ChatGPT Image 2025년 7월 3일 오전 10_32_06.png


마치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잠시 맨몸으로 어딘가에 갔다 온 기분이랄까?


그 안에서 나도,

그리고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잠시 그때의 색들을 떠올리기를 바래본다.


놓고 온 것도 있고,
가지고 나온 것도 많다.


ChatGPT Image 2025년 7월 3일 오전 10_39_28.png


뭐…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당하고 또 당한 만큼 후임들한테

나도 꽤 부조리하게 했던 것들,

그건 거기다 두고 나왔다. 하하.


그렇게 말은 해도,

나는 그 안에서 나름 합리적으로

행동하려고 애썼다.


이유 없이 누군가를 괴롭히진 않았고,

필요할 땐 배려도 했다.


그래서일까, 가지고 나오는 것들이 많았다.

함께 복작복작했던 선임들,

후임들. 조금은 단단해진 마음가짐.

입대부터 전역까지 지나간 생각들.

그리고 그 속에서 생긴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의미들.


참 많이 놓고 나왔고,
참 많이도 안고 나왔다.


ChatGPT Image 2025년 7월 3일 오전 10_45_44.png


군대라는 곳,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잘 모르겠지만,

지나고 보니 참 괜찮았던 시간이었다.


힘들었지만,

나는 그 안을 견딘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자라났던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나답게 울리고 있었고,

조금씩, 좋은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전 09화보이지 않는 울림이 쌓이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