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로 버티는 사람

#_14

by 살짝미친 바나나
매주 마지막 장에 이름이 붙었다.
마음은 무너졌지만,
적어도 의자는 놓지 말자고 생각했다.
비공식 경기라면—
엉덩이로는 지지 않기로 했다.

시작은 늘 그 게시판 마지막 장에서부터였다.


대입학원이란 게 참 잔인했다.
매주 토요일 오전, 모의고사를 본다.
그리고 그 다음 주 월요일,
1등부터 꼴등까지의 이름이

순서대로 학원 복도 게시판에 붙는다.


내 기억으로는 700등, 800등까지 이름이 붙었던 것 같다.

정확하게 서열화된 한 장의 종이 앞에 서면,
누가 보지 않아도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 종이 끝에 매주 내 이름이 있었다.

자퇴하고, 다짐도 하고,

혼자 맨몸으로 들어온 건 나였는데—
그 다짐은 어느새 흐릿해졌고
현실은 매주 낙담과 무력감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하루는 늘 똑같았다.
ChatGPT Image 2025년 7월 31일 오후 12_49_41.png


새벽에 눈을 떠 지하철을 타고 학원에 도착하고,
오전에 수업 듣고,

점심 먹고 또 수업 듣고,
오후엔 자습하다가 지친 몸을 끌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갔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
하하호호 웃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혼자 무표정하게 서 있으면
이상하게 나만 세상에 낀 사람 같았다.


저녁엔 다시 퇴근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제 몫을 하고 있는 걸까?”
자기 의심이 가슴을 건드렸다.

그렇게 한 주 한 주는 너무도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월요일
게시판 마지막 장에 붙은 내 이름을 확인했다.
또 거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ChatGPT Image 2025년 7월 31일 오후 12_53_29.png


늘 하던 대로 아침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고,
도서실에서 문제를 풀다 지쳐
가방을 싸고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문 앞에서,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맨 앞장에 있는 아이들.
공부 잘하기로 유명한,
늘 이름을 상단에 올리는 친구들이
책상에 고개를 묻고
숨도 쉬지 않는 사람처럼 집중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지금 집에 가지?”
“이렇게 적당히 공부하고, 이대로 집에 가면서,
그 앞자리로 가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


마지막 장에 이름이 있는 내가
앞 장을 부러워할 자격이 있을까?

아무리 실력 차가 나더라도,
태도만큼은 따라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때 처음, 이건 실력 문제가 아니라

엉덩이로 버티는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날부터였다.
ChatGPT Image 2025년 8월 4일 오전 11_19_02.png


내 안에서 작은 싸움이 시작됐다.

나는 학원에서 가장 먼저 도착해 앞자리에 앉았다.
도서실 불을 제일 마지막에 끄고 나왔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비공식 경기’에서
나는 절대 지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성적표는 여전히 마지막 장에 있었지만
그 자리를 오래 지키는 힘만큼은 누구보다 갖고 있다고,
나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기록은 매번 졌지만,
자세는 매일 이기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엉덩이로 버티는 사람이 되었다.

이전 14화세상이 보기 전, 내가 먼저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