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라지는 중이었다

#_02

by 살짝미친 바나나

요즘 같았으면 번아웃이라고 했을까.
아니면 회피, 자기 부정, 현실 도피.
그때는 그런 말도 몰랐고, 그저
지겹도록 내 안에 들리는 목소리를 외면했다.


밤 12시에 집에 가는 길,
그때마다 한숨이 나오는 걸 알면서도
다음 날 아침 6시에 또 똑같이 집을 나섰다.
아니, 똑같이 도망쳤다.


나는 낮이 싫었다.


햇빛 아래에선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나는 딱히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 없는 새벽에 나왔고
사람 없는 밤에 들어갔다.
그게 현실을 외면한 방식이었던 것 같다.


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정확히는, 평범한 고등학생의 연장선 같은 대학생.


1학년 1학기가 끝나고 처음 맞는 여름방학.
대단한 건 없었다.
그냥, 매일 아침 6시에 집을 나섰고
저녁 12시에 귀가했다.


18시간 동안 있었던 장소는 PC방.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 여름의 나는 나름대로 끈기가 있었다.
지독할 만큼 아무 것도 안 하는 데에 말이다.


나는 그 여름, 하찮은
하루를 만들고 있었다.

학생이 돈이 어디 있겠나.
PC방 갈 돈은 부모님께 “책 사야 한다”고 말해서 받았다.
그렇게 며칠을, 아니 한 달을 똑같이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린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다.
“엄마 아빠는 몰라”, “그냥 돈만 좀 줘”,
설명해봤자 못 알아들을 거라고 단정짓고,
마치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말한다.


살미바, 부모님의 사랑.png


근데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정작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건, 우리일 수도 있지 않을까.
거짓말하고, 숨기고,
스스로 선을 긋고 나서
“이 사람들은 원래 모른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스스로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나는 그 여름, 그렇게 하찮은 하루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마치고


어두운 골목을 따라 집에 돌아가는 길,
가로등 아래에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나는 별생각 없이 걷고 있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하지만 그 다음 날도 똑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PC방에 앉아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어떤 위기였는지.


그저 어딘가에서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느낌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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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글이지만 잘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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