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03
때로는 도망이,
처음으로 내가 내린 선택이 되기도 한다.
그날의 나는 겨우겨우 문을 열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화장실에 가려고
헤드셋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순간만큼은 주변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넓은 PC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나처럼 대학생도 있었고,
내 나이보다 많아 보이는 직장인,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아저씨들,
드라마만 틀어놓고 멍하니 앉아 있는 어르신도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퉁 하고 울렸다.
“여기 있는 초등학생이 나였고,
중학생도 나였고,
고등학생도 나였고,
대학생도 지금의 나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나중의 나도 여기에 있을 거다.”
그 순간이 무서웠다.
하루를 때우고 있었다.
이게 반복되면 평생을 때우게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 길로 정신을 차렸다.
대단한 결심은 아니었다.
딱 2주 뒤에 입대 가능한 병역 지원을 넣었다.
뭔가를 하자니 당장 할 게 없었고,
계속 이대로 있다간 정말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다.
신청서를 넣고 나서
나는 여전히 PC방에 앉아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대로였다.
겉으론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지만
그 2주는 뭔가 달랐다.
그건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처음으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예전엔 하루를 때우고 있다는 기분이었는데
그때의 나는 하루를 쌓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똑같이 게임을 했고,
똑같이 가로등 아래를 지나갔지만
예전처럼 한숨이 먼저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 2주는
하찮기만 했던 하루가
처음으로 의미를 가진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것이
‘내가 선택한 하루’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 무언가라도, 어떤 것이라도
시작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다.
그게 모두가 다 하는 입대였을지라도,
그때의 나는
“그거라도 해보자”는 마음을
내게 가장 조용히, 가장 자주 건넸던 말 같았다.
도망처럼 보였어도,
그건 내게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가 내린 선택이었다.
남들보다 늦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도 내 인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