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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Feb 25. 2021

약 18제곱미터의 방에서 거실을 누리는 방법

05 동네는 나의 집, 대방동 원룸 이야기



무단 주거침입을 겪은 후 급하게 구한 방은 신대방 삼거리에 위치한 5.5평 남짓의 자그마한 원룸이었다.


앞 건물 학원 선생님들이 삼삼오오 담배를 피우거나,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누군가의 험담을 하는 테라스가 코 앞에 내려다 보여 대부분의 시간은 창문을 열 수없는 곳으로, 그토록 바랐던 ‘창 밖을 내다보는 집’에서의 생활은 지속할 수 없었던.


그래도 우리 집 문을 비춰주는 CCTV가 있었고, 바로 앞에는 초등학교가 있어 밤마다 경찰차가 순찰을 돌았다. 그래, 이거면 되었다.



집은 다시 자그마하고 답답해졌지만, 그 덕에 주말이면 집 앞의 대형 카페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 앉아 한 주의 일과를 정리하던 중에 1인 가구에게 카페는 거실의 역할을 한다는 기사를 읽었고 그때부터 동네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그래, 여긴 나의 거실이구나!


집이나 학교, 직장만이 나의 공간이 아니라 조금만 둘러보면 동네 곳곳에 내가 누릴 수 있는 나의 공간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기사 한 줄이 나의 동네 활용법을 확 바꾸어 놓은 것이다.



내가 정한 나의 거실, 나는 퍼블리코의 아이스라떼와 샌드위치를 좋아했다.


기사에서 처럼 5.5평의 원룸은 나에게 작은 방의 역할을 했고, 동네 이곳저곳에 기분이 내키는 대로 골라 갈 수 있는 ‘거실’을 만들었다. 그뿐이랴. 부엌은 없었지만 ‘식탁’은 얼마나 많이도 만들었는지.


거기에 더해 마음이 복잡할 때는 보라매공원으로 향하거나 동작 충효길을 걸었고, 버스를 타고 고개를 넘으면 관악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 근처 피트니스센터에서는 처음으로 스피닝을 접하고 스피닝의 재미에 푹 빠지기도 했다. 그간 옮겨 다녔던 여러 동네들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동네였지만,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대로 집이 확장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취업준비생이었다. 다신 없을 경험이었으나 어느 새벽 생방송을 준비하다 부품 같은 기분이 불쑥 찾아와 2년 간의 방송작가 생활을 정리하고, ‘소속감’이라거나 ‘안정감’이라는 단어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던 시기.


토익의 T도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던 내가 토익, 토익스피킹 점수를 만들고, 컴퓨터 활용능력과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과 같은 이름의 자격증을 따던 그 시기를 이 집과 함께했다. 그래서 동네가 주는 힘이 더욱 컸다.



오랜시간 나의 취미였던 필사와 캘리그래피, 그리고 취준생에게 너무나 와닿았던 시. 역시 그당시 퍼블리코에서 썼다.


그렇게 취업준비생으로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보내고서야 나는 취업을 했다. 과학기술계 신생 연구소의 인턴 자리였다. 인턴으로 일을 하다 계약직 면접에 붙고, 다시 면접을 보고 정규직이 되는 시간 동안 그 작은 방에서, 넓은 동네를 집처럼 여기며 지냈다.


그래서인지, 3년이라는 꽤 긴 시간 동안 산 공간이지만 방 자체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가 않다.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지코바 양념치킨에 떡사리를 추가해 먹으며 모던 패밀리나 투 브로크 걸즈 같은 미국 시트콤을 보았고, 드물게 밥을 차리거나 설거지를 할 때는 현관문 앞에 위치한 싱크대 앞에서 신발을 밟아가며 집안일을 해야 했던 기억 정도가 전부다.


어쩌면 그랬던 덕에, 나는 집이 아닌 공간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식에서 스피닝 공연이 펼쳐지는 잊지 못할 기억을 안겨준 동네 동생을 알게 되었으며, 관악산을 수도 없이 오를 수 있었고, 저렴한 비용으로 건강한 반찬을 한 가득 안겨주시는 밥집 아주머니에게서 엄마의 정을 느낄 수 있었을 거다.


그렇게 3년 정도를 살아가던 나는, 다시금 ‘창 밖이 내다보이고, 볕이 잘 드는 집’을 꿈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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