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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Feb 16. 2021

창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집

04도망치듯 떠나게 된 장승배기 원룸 이야기


오랜 반지하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혼자 살게 되었을 때 내가 바란 것은 단 하나였다.


창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집.


탁 트인 전망이라거나, 아찔한 높이 같은 것은 필요 없었고, 그저 밖을 올려다보지 않을 집을 원했다. 발품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한 첫 집이었다. 그러니까, 비로소 진정한 독립이었다. 룸메이트나 주인 가족과 한 공간을 쓰지 않고, 불특정 다수와 화장실을 공유하지 않으며, 가족과도 완전하게 떨어져 온전한 콘크리트 벽 안에 나 혼자 살게 될 집.


그 집은 장승배기역 근처에 있었다. 6평 정도의 원룸이었고 4층에 위치해 창밖이 적당히 내려다보이는, 아담하지만 만족스러운 집이었다. 그곳에 살면서 나는 방송작가로서 두 번째 직장인 KBS에 다니기 시작했고, 책상 앞에 앉아 숱한 전화 인터뷰를 했다. 이 시기를 기억하는 이유는 평화로운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이 있어서다.




그때까지 나는 여자 혼자 산다는 것을 약점으로 생각한 적이 한 순간도 없었다. 그런데  더 강해져야겠구나 결심한 날이 있다. 꺼내기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이사 연대기에서 빼놓을 수는 없는 하루이므로 남겨보기로 한다.


그 날은 8개월 간의 KBS 생활을 마무리한 퇴사 3일 차였다. 그러니까, 드디어, 꿈에 그리던, 백수가 된 행복한 나날. 느지막이 일어나 집 근처 카페에 가서 여유를 즐기고 미래에 대해 조금씩 고민해볼까 하는 생각을 이제 겨우 시작했을 때였다. 오후 4시경, 평소엔 출근으로 집을 비웠을 그 시간에 나는 달콤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꿀 같은 단잠에 빠져있는데, ‘똑똑’ “택배요!”하는 택배 아저씨의 외침이 잠깐 들렸던 것 같다. 택배는 늘 나 대신 문이 받아주었으므로, 잠시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에 들었다. 30분 정도 흘렀을까 ‘삑삑삑삑’ 하며 갑자기 누군가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노려보며, 누군가 집을 착각했나 보다 하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런데,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띠리릭’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도어록 뚜껑을 밀어 올려 열고 여섯 자리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이 열리는 그 순간순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잠결에 내가 지금 남의 집에 들어와 있나? 하는 착각까지 할 정도였다.


선명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 남자는 하늘색 피케티를 입고, 손에는 하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뭔가 고치러 왔나? 이 집 비밀번호는 아무에게도 알려준 적이 없는데.....’ 집안으로 성큼 들어오다 자신을 바라보는 내 존재를 확인한 그 남자는 나만큼이나 당황한 듯 보였다. 그리고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문 앞까지 갔으나 그 이상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모기 같은 소리로 ‘누구세요’하고 외칠 뿐이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되고 그냥 세상이 멈춰버렸다. 저 사람은 누구지? 언제부터 이 집을 드나든 거지? 그리고 무엇보다.. 도대체 왜?


바보 같게도 나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이유가 있기를 바랐다. 우리 집을 통해 수리해야 할 게 있는데 나에게 상의를 미처 못하신 것일 수도 있잖아. 꼭대기층에 살고 계신 집주인 아주머니께 전화를 했다. 아주머니는 본인은 모르는 일이라며 ‘우리 건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하는 말만 반복하시고는, 지금 교회에 있으니 저녁에 보자며 전화를 끊으셨다. 집에 있기가 두려워 카페에서 몇 시간을 떨었다. 주인집에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경찰서에 전화할 생각을 하지 못 했다. 참으로 답답한 지난날의 나여. 자초지종을 들은 아주머니는 CCTV를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조작법을 모른다며 내일 아침 남편분이 오시면 연락을 주시겠다고 했다. 그날 밤은 근처 선배네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인천에서 휴가를 내고 날아온 오빠와 같이 경찰서에 갔다. 경찰과 함께 확인한 CCTV에는 내가 본 사람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은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CCTV는 1층 출입구에만 있었다. 그러니까, 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나 말고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경찰이 이 건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세입자들이 불만을 표출하면 책임을 질 수 있겠냐는 눈빛에 나는 겁을 먹었다. 내가 피해자인데 귀찮은 일을 떠안은 듯 이야기하는 얼굴에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한집 한집 조사를 해 그 사람을 마주하는 게 더 무서울 것 같았다. 내 말은 귀담아듣지 않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말은 믿을까 봐 두려웠다. 나는 당장 이사를 가기로 했다.






넓다거나, 창 밖을 내려다볼 수 있다거나,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음에 갈 집은 무조건 층마다 CCTV가 있는 집이어야 했다.




ps. 지나간 일에 큰 후회를 하지 않는 편이지만, 범인을 잡지 못한 것은 여전한 후회로 남는다. 큰 해코지를 당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며 애써 위안을 삼기보다는, 맞설 부분에는 맞서는 사람이 되자고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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