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방에 누워서 듣는 빗소리를 참 좋아했다. ‘타닥타닥’ 거리는 소리였다. 방 창문과 연결된 창고의 알루미늄 상판을 두드리는 소리였는데, 꽤나 경망스러웠지만 왜인지 내 마음에 위로를 주었던 것 같다.
문. 202호이지만 반지하였던.
그 집은 고개의 꼭대기에 있는 반지하방이었다. 가파른 경사에 자리 잡은 오래된 건물, 정면으로 들어가면 2층이었고, 뒤편으로 들어가면 반지층인 그런 구조였다. 동네의 이름은 ‘청림동’이었고, 고개의 이름은 ‘봉천고개’였다. 서울에서 살게 된 세 번째 집은, 서울 한복판에 있지만 정말이지 사람 사는 냄새가 폴폴 나는, 언제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릴 것 같은 정겨운 곳이었다.
고시원에서 1년 하고도 절반을 보내며, 나의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즈음, 두 살 터울의 오빠가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위해 서울로 왔다. 각자의 학교가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경제적인 부담을 덜기 위해 같이 살기로 했고, 투룸을 구하러 다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는 그리 많은 방을 보지 않았다. 한정적인 예산으로, 어느 한 명이라도 도보로 통학할 수 있는 동네에 살아야 했기 때문에 후보지가 많지 않았던 탓이다. 오빠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리판단이 빠르고 똑 부러지는 사람인지라 나는 그저 부동산에 당차게 들어가는 오빠를 따라다닐 뿐이었다.
우리가 살 집은 그렇게 정해졌다. 그래, 이때까지 내가 살았던 곳이 ‘방’이었다면, 그곳은 ‘집’이었다. 방도 있었고, 가족도 있었다. 그 집은 보증금 천만 원에 월세 40만 원, 적당한 크기의 거실과, 널찍한 화장실, 그리고 방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는, 그러나 빛은 잘 들지 않는 오래된 주택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우리 남매는 참 사이가 좋(아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 집에 살던 시절 우리는 진짜 많이 싸웠다. 부끄럽게도 돌이켜보면 가장 많이 싸운 이유는 ‘치킨’이었다. 나는 치킨 먹고 싶은데 쟤가 먹기 싫으면 괜히 심술이 나고, 내가 다이어트를 다짐하는 날이면 쟤는 꼭 치킨을 시켜먹자고 한다. 일주일 중 6일 정도를 싸우고 나면 하루 정도는 둘 다 행복하게 치킨을 먹는 날이 온다. 그래서 나는 반지하에 살며 무럭무럭 (옆으로) 자라났다.
동네 탐험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엄마 아들 때문이다. 오빠는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는 게 좋다며 자주 나가 걸었는데, 그 덕에 한 번씩 같이 산책을 나가면 무서워서 못 가본 구석구석을 다닐 수 있어 좋았다. 봉천고개, 그러니까 이쪽의 오르막과 저쪽의 오르막이 만나는 그 끝에는 대단지 아파트와 오래된 집들이 경계를 이루며 놓여있었는데, 빵집과 문구점 같은 것들이 가득했던 아파트 단지 상가와 아파트 장터(매주 무슨 요일마다 돌아오는 그런 것도 여기서 처음 접했다!)를 경험할 수 있었고, 고개 아래로 쭉 내려가면 큰 규모의 시장에서 언제고 ‘자~ 칼치가 키로에 얼마’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글에는 벌레 이야기가 나오므로, 비위가 약하신 분은 다음 구분선으로 가주세요.)
그 집에서 내가 싸운 대상은 오빠만이 아니었다. 오래된 반지하 건물답게 우리가 힘을 합쳐 싸워야 할 대상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곰팡이와 벌레 친구들이었다. 비가 내린다고 무작정 곰팡이가 꽃을 피우는 그런 집은 아니었지만, 초반에는 꽤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다. 방에 있던 가구 뒤에서 주로 곰팡이가 피어났는데, 닦아도 생기고 없애도 고개를 드는 그 끈질긴 생명력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근질거린다. 마트에서 파는 곰팡이 제거제를 열심히 뿌리고 닦아주며 곰팡이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런데 이기지 못할 존재들이 바로 벌레였다. 바퀴벌레 정도라면 귀여웠을 텐데, 다리가 막 물결을 치며 기어가는 돈벌레(윽. 맞는지 확인하려고 검색했다가 괜히 어디 벽에 붙어 있을까 봐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부디 검색은 삼가시길)가 가장 자주 나왔다. 그런데 그러나, 내가 그 집을 떠올리면 잊지 못하는 장면 넘버 원은 바로 ‘꼽등이’님과의 만남이었다. 나에겐 유니콘마냥 상상 속의 존재이었던 꼽등이가 화장실에 등장했을 때 나는 세상이 멈춰버린 줄 알았다. 그는 생각보다 더 굳건해 보였으며, 더 무지막지했다. 한 시간 정도의 대치상황이 있었던 것 같다. 도망가거나 사라져 버리는 더 끔찍한 상황은 싫어서 눈을 마주한 채로 벌레퇴치약을 살금살금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 꼽등이에게 약을 뿌리면 그는 정말이지 럭비 공보다도 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약을 뿌림과 동시에 나를 향해 돌진하는 그의 모습이 내 기억 속 필름의 마지막 장면이다. 어떻게든 그 시절의 나는 그가 아무리 꼽등이라도 곱게 보내진 않았을 거다.
그 집에서는 꽤 오래 살았다. 3년을 조금 넘기는 시간이었다. 그러는 동안 오빠는 취업을 하고, 어느 시기에는 밀양에 사는 사촌동생이 상경하여 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 방은 작은방에서 큰방으로 바뀌었다. 한층 위에 살았던 주인 가족은 늘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주셨고, 정월대보름에는 찰오곡밥을 지어다 주시기도 했다. 사소한 정, 같이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집에서 방으로 독립하게 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