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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Feb 09. 2021

남향도, 서향도 아닌 복도향을 아십니까.

02 상도동 고시원 이야기.



아아, 그곳은 정말이지 최고의 입지였다. 학교에서 왕복 이차선 도로만 도로록~ 건너면 되니 도보 3분, 그 마저도 와다다!! 뛴다면 1분에 주파가 가능했다. 1층에는 H 모 프랜차이즈 카페가 널찍하니 자리했고, 내가 살게 된 3층은 여성 전용이라 안전하단다. 그렇다. 그때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훗날 이곳에서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버릴 줄은.


"아, 고시원 살 때요? 제 인생의 암흑기였죠."


눈칫밥 먹느라 배가 빵빵하게 불렀던 하숙 생활을 청산하고, 내가 향한 곳은 한평 남짓한 고시원이었다. 아침이면 귀찮게 깨우는 사람도 없고, 늦은 귀가 시 뒤꿈치가 땅에 닿지 않게 애쓰며 살곰살곰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 바로 옆에서 숨 쉬는 룸메이트의 기분을 곁눈질로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으이구 철없던 스무 살의 나여) 나름 "스토리하우스"라는 서사가 담겨있는 듯한 이름을 가진 프랜차이즈로, ‘리빙텔’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었으며, 깔끔한 축에 속했던 나의 두 번째 정착지.



고시원 방을 고를 때 메인 옵션은 바로 창문인데, 창이 바깥으로 나있느냐, 복도로 나 있느냐, 그것이 핵심이다. 창의 방향에 따라 월세가 무려 10만 원이나 차이 났다. 인간이라면 응당 바깥 공기가 통하는 집에서 살아야 함을 그때는 몰랐다. 복도향이어도 사람이 사는데 지장이 없겠지, 생각했다. 이 창이나 저 창이나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전자레인지 보다도 작았고, 한 달에 부모님께 10만 원만큼의 손을 덜 벌려도 되었다. 결국 창이 복도를 향한 방을 선택했다는 말을 좀 길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내 1년 반의 암흐ㄱ... 아니 고시원 생활이 시작된다.






최소 공간에 최다의 인원을 살도록 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 무릇 고시원 아니겠는가. 그 단순한 사실을 입실 해서야 깨달았다. 그곳은 한 층에 사는 열댓 명의 사람들이 내는 다종 다기의 생활소음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복도를 지나는 사람들의 발소리, 앞 방의 통화하는 소리, 옆 방에서 기침하는 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거 모르고 시작한 생활이 아니었고, 나도 내는 일상적 소음들이었으니까, 사실 힘들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서러웠던 장면을 떠올려보자면, TV에 이어폰을 꽂아서 보았던,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누워서 TV를 보겠다고 무엇이든 다 파는 곳에 가서 2m짜리 연장선을 사서 이어폰과 TV를 연결해 침대 누웠으나, 1.5m는 바닥에 그대로 돌돌 말려 있어 왜인지 TV를 볼 때마다 귀가 묵직했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이다.






방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화장실이 없는 방이 더 쾌적할 거야 :D'라고 애써 위안 삼았지만, 애초에 복도로 창이 난 방에는 화장실이 있을 수가 없었다. 암튼, 한 층에 사는 그 열댓 명의 사람 중 방에 화장실이 없는 사람이 약 열명 정도. 그 열명이 화장실 겸 샤워실 두 개를 공유하는 구조였다. 말이 화장실 겸 샤워실이고 가로와 세로가 각각 80센치, 100센치 정도 되는 좁은 샤워부스에 변기가 달려있는 느낌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목욕탕 가듯 작은 바구니 하나 들고 총총. 타이밍이 좋지 않으면 나란히 자리한 문 두 개가 굳게 잠겨 있었고, 그럴 땐 다시 총총 방으로 들어가서 방문도 닫지 않은 채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침대에 앉아 눈치게임을 해야 했다. 실은 절반 정도의 기간에는 한쪽 화장실이 고장 나있었고, 남은 절반 정도의 기간에도 두 화장실 중 한 칸에서 샤워를 하다 보면 발목까지 금세 물이 차올랐다. 머리카락이 빠지는 속도가 치우는 속도를 도무지 따라올 수 없었을 거다.


방들은 마치 코인 노래방 마냥 몸을 붙이고 있었고, 내 방에서 나와 왼쪽으로 한번 꺾어 복도 끝으로 가면 화장실, 거기서 한번 더 왼쪽으로 꺾어 끝까지 가면 주방 겸 세탁실이 있었다. 그렇다. 어떤 공간에게도 단 하나의 정체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화장실 겸 샤워실, 주방 겸 세탁실, 스마트폰이 발달할수록 카메라 겸 컴퓨터 겸 전화기가 되어오고 있으니 이것도 공간의 고도화라고 볼 수 있는 건가. (아무 말) 그러니까 그 주방 겸 세탁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처음 상담을 받으러 갔을 때 총무님께서 자랑해 마지않던, 무제한 밥과 김치 그리고 라면이 제공되는 공간이었다. 실제로는 대륙 느낌 풀풀 나는 김치에, 누군가 취사가 아니라 보온을 잘못 눌러버린 것 같은 텁텁하고 맛없던 밥, 그리고 생라면으로 부셔먹기만 하던 라면은 그곳의 메리트가 되지 못하였다. 한 구석에 자리했던 세탁기는 두 대였다. 세탁이야 화장실처럼 눈치게임을 하며 쓸 수 있었는데, 사실 세탁을 한 후가 더 문제다. 여태 베란다가 있는 집에 살아본 적이 없으므로 내 세탁물들은 약 1n년 동안 강렬한 햇빛 살균을 받지 못했는데, 그래도 그나마 고시원 이후에는 대자로 펼쳐진 빨래건조대에서는 말리고 있다. 그렇다면 고시원에서는 빨래를 어떻게 말릴까. 정답은 두구두구, '봉'이다. 침대 위에 기다란 ‘봉’이 달려있는데, 그게 바로 빨래건조’봉’인 것이었던 것이다. 빨래를 옷걸이에 고이 걸어 챡챡 걸어놓으면, 잘 자고 일어나 눈을 뜨면 덜 마른 옷가지들이 대롱대롱 나에게 인사를 건네고,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내 빨래 구경도 덤으로 시켜줄 수 있었다. 지금 내 눈에 흐르는 한 줄기 물방울은 무시해주시기 바란다.








지금까지 살아온 바에 따르면, 나는 아침형 인간이다. 주말에도 7-8시에는 눈이 떠지고, 11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그런 내가, 햇빛 한줄기 들지 않는 곳에서 1년이 넘게 살았으니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건강했을 리 없다. 이렇게 다소 처절한 환경에도 내가 고시원 생활을 꾸역꾸역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시간이 갈수록 방에 잠만 자러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침이 오는지 가는지 알 수 없었던 그곳에서 눈을 뜨면 한눈에 들어오는 천장의 네 모서리가 점점 좁아져 나를 없애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집 밖에 있기를 택했고, 동아리방 붙박이가 되었다. 수업이 없어도 9시면 동아리방에 갔고, 모든 수업이 끝나고 동아리방에서 동기, 선후배와 노닥거리다 10시~11시에 눈을 붙이러 이차선 도로를 도로록 건넜던 것이다. 마침 집에서 길을 건너면 처음 맞이하는 학교 건물이 학생회관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취향이 통하고 관심사가 비슷하기도, 너무 다르기도 한 동아리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한 평짜리 고시원에 나에게 준 것이 이 사람들이었나, 새삼스러운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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