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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Feb 09. 2021

똑똑똑, 하숙생을 구하시나요?

01 상도동 하숙집 이야기



08년도에 하숙집을 구하는 시스템은 이랬다. 하나, 거주하고자 하는 동네로 향한다. 둘, 이 골목이 좋겠다 싶은 쪽으로 무작정 접어든다. 셋, 전봇대와 담벼락을 유심히 살핀다. 넷, ‘하숙’이라는 커다란 글씨 아래 써져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용기였나 모르겠으나, 그땐 그게 당연했다. 그렇게 몇 차례 낯선 집 거실에서 주인 할머니, 아주머니 등과 대면하여 면접 같은 시간을 보내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면, 타지에서 살아가게 될 공간이 정해지는 것이다.


몇 군데의 하숙집을 전전하다 닿은 곳은 학교 앞 언덕에 위치한 오래된 다가구주택의 꼭대기 층이었다.


어디에서 왔어요? 식사는 아침만 주고요. 일곱 시 반에 다 같이 먹어야 해요. 화장실은 저쪽. 하숙생은 학생 포함 네 명이예요. 그런데, 지금 남은 방은 2인실 밖에 없는데, 괜찮나요?


그렇게 나는 처음 보는 언니와 방 하나를 공유하며 첫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현관을 기준으로 오른편에는 주인 가족 거주 공간이 있었고, 왼편으로는 하숙생이 거주하는 방 세 칸이 마주 보고 있었다. 두 개의 1인실에는 각각 언니 한 명과 동갑내기 친구 한 명이, 가장 안 쪽에 위치했던 2인실에는 철학과에 입학 예정인 언니가 이미 입실해 있었다. 나는 2인실의 문쪽 공간을 배정받았다. 잠을 자기 위해서는 얼굴 절반 정도가 책상 아래로 들어갔고, 발은 문이 열릴 때마다 치이는 위치였다.





2.

다른 거주공간과 하숙의 가장 큰 차이점은 ‘숙’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숙식’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점. 아마 부모님께서 하숙을 권하셨던 건 눈 뜨고 코 베어간다는 서울에서 어린 딸이 혼자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그래도 한 끼는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안심 때문 아니겠는가. 딸을 깨우기 위해 매일같이 아침을 차리던 손으로 챱챱 찬물 마사지를 해야 했으니, 새내기 시절 하숙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자느라 아침을 굶거나 대충 때웠을 거다.


아침의 풍경은 비슷했던 것 같다. ‘일어나서 아침 먹자’ 하는 아주머니의 외침이 몇 번 들리면 잠깐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가 다시 잠이 든다. 그다음엔 방문을 여는 소리.. 아니 방문이 내 발을 치는 썩 유쾌하지 않은 느낌에 겨우 깨어난다. 퉁퉁 부은 눈을 뜨지도 못한 채로 식탁으로 직행해서 밥을 먹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그대로 눕는다. 수업에 지각하지 않을 만큼 더 자고 일어난다. (물론 1학년 때는 숱한 지각과 자체 공강을 하였다.)


하숙 시절, 누군가의 집에 얹혀 산다는 것이 때때로 서러울 때도 있었지만 겨우 눈을 떠서 먹는 아침 식사만큼은 참으로 풍족하고 맛있었다. 달라지는 메뉴 속에서 늘 한자리를 지키고 있던 양상추 샐러드는 특히 좋아한 메뉴였는데, 아주머니께서 직접 만드신 사과 드레싱이 셰프의 킥이었다. 아, 아직도 궁금하다 어떻게 만드신 건지.


아침은 알찬 집밥을 먹었지만, 저녁은 조금 달랐다. 새내기의 의무를 다하고자 주 3~4회 ‘희망 주(酒)립대’나 ‘이모 이모’ 같은 이름의 학교 앞 저렴한 술집에서 곡기와 알코올기를 같이 채웠으며, 술자리가 없을 때는 ‘김밥이 맛있는 집’에서 참치김밥을 포장하여 방 한편에서 먹었다. 그러다 어느 날 저녁 방에 있는데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소리가 들렸다.


맞은편 방에 살던 하숙생 A였다. 그녀는 저녁을 같이 먹자고 제안했고, 1인실에 대한 호기심과 배고픔에 이끌려 마치 다른 공간에 가듯 복도를 건너 앞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신문물이 있었는데 바로 ‘라면포트’라는 기계로, 라면 하나를 쏙 털어 넣으면 팔팔 끓어 맛있는 라면이 탄생하는 신세계를 선사했다. 그렇게 종종 이제는 이름도 잊어버린 그녀의 방에서 우리는 종종 라면이나 치킨 같은 것들을 먹었고, 그렇게나마 서울 생활에 기름칠을 했다.






하숙 생활은 점점 팍팍해져 갔다. 지금보다 훨씬 부족한 사람이었던 나는, 생활패턴과 감성이 다른 룸메이트 언니에게 친밀하게 굴지 못했고, 아침에는 점점 일어나기 힘들어져 따뜻한 집밥을 먹는 일도 줄어 갔다. 화장실에 걸려 있던 휴지는 일반적인 롤 휴지에서 공용 화장실에서 쓰는 점보롤로 바뀌었고 여름방학 즈음에는 휴지는 직접 사서 쓰라는 공지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계약기간이 종료됨과 동시에 한 뼘짜리 창문이 복도로 나 있는 한평 남짓의 고시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공간에 대한 취향이랄 게 없었고, 집에 대한 정의랄 게 없었다. 그저 내 한 몸 뉘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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