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대신 사원증

by 이새란

“KBS 신관으로 가주세요”


다섯 시, 택시를 타고 아직 깨어나지 않은 도시를 바라본다. ‘이렇게 또 금요일이 왔구나.’ 5층 사무실에 들러 어제 열심히 밑줄 친 대본, 커피믹스와 스케치북, 여러 소품을 덜덜덜 거리는 끌차에 싣고 1층 대기실로 향한다.


대기실 문을 열고 불을 켠다. 테이블 한복판에 커피믹스와 대본을 세팅하고, 분장팀에 오늘 출연자 정보를 전달한다. 피곤함에 바싹바싹 마르는 목은 잠시 뒤에 축이기로 하고, 일단 스튜디오로 가야 한다. 뱅글뱅글 철제 계단을 올라 아무도 없는 부조종실에 오늘의 대본을 세팅하고, 다시 뱅글뱅글 계단을 내려간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다.


소품을 준비하던 FD 언니와 안부를 나누고, 기다란 막대로 조명을 세팅하던 스태프에게 눈인사를 건넨다. 막내 스태프들이 스튜디오 곳곳에서 생방송을 준비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자주 바뀌는 탓에 안면을 트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 그즈음이면 저 멀리서 출연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보인다.


“선생님~ 오셨어요? 밖에 많이 춥죠. 바로 분장실로 가시겠어요? 대본은 가져다드릴게요. 커피 드릴까요, 녹차로 드릴까요?”


메인 언니가 도착하고 출연자들에게 오늘의 대본을 설명하는 동안, 커피믹스를 몇 차례 더 휘휘 저어 그들 앞에 가져다 놓는다. 열두 명의 출연자 중 다행히 늦은 사람은 없고, MC 대기실에도 이상 없음을 확인한다.

어느새 일곱 시 사십 분. 스튜디오로 가 FD 언니와 눈을 마주친다. 언니가 머리 위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린다. 오늘 중 가장 큰 목소리를 내야 할 시간이다. 뛰다시피 대기실로 향한다. 문을 똑똑 두드리고는 소리친다.


“스튜디오로 이동하실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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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그해 겨울 새벽하늘은 유난히 까맸다.


열세 살부터 꿈꾸던 방송작가가 된 지 1년하고도 6개월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다큐멘터리 취재작가 생활을 마치고, 금요일 아침 생방송 막내작가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던 시기. 짹짹거리는 새소리와 신나는 트럼펫 선율이 흐르는 시그널 음악이 인상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이 직업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마도 그날이었을 것이다. 조용하지만 분주하던 새벽의 스튜디오에서 함께 일하는 막내 동료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던. 그리고 결국은 나의 표정을 돌아보게 되었던 날.


그렇게 차갑던 겨울이 지나고 나무에 연둣빛 잎들이 돋아나기 시작할 무렵, 오랜 고민 끝에 그 꿈을 놓기로 했다. 스물일곱이었다.


방송작가를 그만두고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취업준비생으로 보냈다. 그 기간에는 스스로 ‘꿈을 이룬 사람’으로 기억해야 하는지, ‘꿈을 포기한 사람’으로 정의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꿈을 대신할 사원증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새 서른셋, 그 사이 나는 6년 차 직장인이 되어버렸고, 야속하게 흘러간 시간 속에서 깨달은 몇 가지가 있다. 꿈이라는 것이 ‘방송작가’처럼 단 몇 글자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저 오랜 시간 원했던 바를 이루어본 경험이 있고, 다른 목적지를 발견하고 스스로 방향을 바꾸었을 뿐이라는 사실도.


얼마 전 읽은 오키로북스의 전문경영인 김경희 작가님의 에세이 《경희씨, 요즘 어떻게 지내요》에서 이런 문장을 마주했다. “다행이다 싶었다. 버티는 사람도 버티지 못했던 사람도 잘 지내고 있으니.” 고개를 크게 끄덕이게 한 문장이었다. 함께 시작하여 지금까지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 동료들도, 그곳에서 나와 이런저런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도, 그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나.


요즘은 삶의 주체가 되어 만들어가는 일상의 물결을 바라보는 일이 즐겁다. 2021년 4월의 나는 대단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것보다, 순간순간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주어진 일을 하면서도, 하늘이 파란 날에는 등산화 끈을 고쳐 묶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노트북을 챙겨 카페로 나서는 거다.


‘대타’라는 키워드를 듣고서 ‘꿈’이라는 단어가 생각난 것은 의외다. 꿈을 대신해서 사원증을 선택했다는 마음의 빚을 나도 모르는 새 지고 있었나 보다.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일과 일상을 오가며 하루하루를 채워나가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꿈’도 ‘사원증’도 대신하지 않는, 그냥 ‘나’라는 사실을.


공허하고 막막할 때 마음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무엇도 나를 대신하지 않는 삶을 앞으로도 지속해나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오랜 좌우명을 또박또박 적어본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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