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새란 Jun 15. 2021

비가 쏟아지면 초콜릿언덕으로 가자

필리핀에서 만난 스콜의 매력


쏴아아 -


또 속았다. 맑은 하늘과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을 보고 우산을 두고 나왔는데.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우리는 고민했다.     


“10분만 기다려보자. 스콜이니까 곧 그칠 거야.”     

“그러다 단어시험에 늦으면 어떡해? 일단 뛰자.”     


그곳은 필리핀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인 네그로스섬 남동 쪽에 자리한 작은 도시, '두마게티'였다. 명문 실리만 대학교가 있어 교육열이 높고, 해변에는 펍이 즐비했으며, 작열하는 태양 아래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던 낯선 도시.     


-

필리핀행은 갑작스러운 선택이었다. 대학교 4학년 1학기, 나는 1년간의 휴학을 앞두고 있었다. 무언가 새로운 경험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학교에서 한 달간 필리핀으로 떠나는 어학연수 공고를 발견했다. 당시 학교에서는 필리핀에 교육 시설을 짓고 있었고, 방학을 맞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공부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이다. 간단한 면접을 통해 선발된 학생은 3~40명쯤 되었나. 그렇게 2011년 여름은, 같은 학교에 다녔으나 일면식도 없었던 이들과 두마게티에서 보내게 되었다.     


갓 지어진, 아니 막 도착했을 때도 교실에는 아직 창문이 없이 뻥 뚫려 있었으니, 아직 지어지는 중인 그 건물에서, 우리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이어지는 수업을 받았다. 수업이 끝나면, 매일 저녁 단어시험을 치기 전까지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우리는 대부분 페디캅(a.k.a 툭툭)을 타고 시내로 나가 쇼핑을 하고 짭짤~하거나 달달~하거나 짭짤달달~한 음식을 먹었으며, 때때로 각자의 방에서 쉬거나, 숙소 앞의 조그마한 공터를 빙빙 돌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매일 저녁 단어시험을 보고, 매주 금요일이면 모의토익을 쳤으니, 분명 그 시간은 ‘어학연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 중 '영어 천재가 될 테야’ 하는 마음으로 한 달을 보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거다. ‘스펙 쌓기’라거나 ‘취업준비’라는 단어에 지칠 대로 지친 우리였다. 자꾸 우리로 묶어서 미안하니까, 우리는 모르겠고, 뭐 아무튼 나는 그랬다.     


남들과 비교하며 나의 부족함을 찾느라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던 시기였다. 그러니 그저 낯선 도시에서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는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로 충분했다. 매일 저녁의 단어시험은 숙소로 돌아오는 페디캅에 앉아 흔들거리는 가로등 불빛에 종이를 비춰보며 벼락치기를 했고, 금요일 모의토익 때는 선생님이 없는 틈을 타 시험장에서 도망쳐 방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으니, 그 시간을 어학연수로 여기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

필리핀 생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쏟아지는 스콜이었다. 수업 중이든, 이동 중이든, 한밤중이든 그 짧고 굵은 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쏟아졌다. 3주 차 주말이었나, 우리는 네그로스 동쪽에 위치한 섬 ‘보홀’로 여행을 떠났다. 투명한 바다에서 스노클링도 하고, 선상 뷔페도 즐기고, 몇몇 관광지에도 방문했다. 그중에는 '초콜릿언덕'이라 불리는 명소가 있었는데, 약 200만 년 전에 형성된 1,268개의 언덕이 펼쳐진 곳이라 했다.


언덕에 올라 멋진 풍경에 넋을 놓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스콜 구름이 보였다. 이동하는 구름 아래가 흐릿했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필리핀에서 자주 마주했던 스콜을 초콜릿언덕에서 바라보았던 그 장면은 사진처럼 남아있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때 나는 스콜과 사랑에 빠졌나 보다.     


화질은 흐리지만 마음은 밝았던, 필리핀에서의 날들(우측이 초콜릿언덕)


-

아무 준비 없이 처음 마주한 스콜은 우리 모두를 당황하게 했지만, 차차 우리는 곧 지나가 버릴 그 비에 적응해갔다. 나는 스콜이 좋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존재감이 좋았고, 땅이 팰 듯 떨어져 어딘가에 고이 쌓아둔 걱정거리를 씻어주는 듯한 시원함이 좋았고, 마음속의 복잡한 말들이 들리지 않도록 해주는 소란스러움도 좋았다. 무엇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데리고 오는 그 천연덕스러움이 미워할 수 없는 최고의 차밍 포인트(charming point)였다.     


그래서인가, 두마게티에서 보낸 한 달을 돌아보면 ‘그날은 비가 내렸다’라고 정의할만한 하루는 떠오르지 않는다. 대체로 맑았고, 때때로 비가 쏟아졌을 뿐이다. 그 후, 나는 어두운 하늘 아래 있더라도 크게 겁먹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잔뜩 흐린 하늘과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면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 쏟아지는 빗속에 있더라도 저 멀리 언덕에서 바라보면 곧 지나갈 구름 아래에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분 돌아가는 출근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