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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Jun 24. 2021

맥주를 마시러 경주에 가는 건 아니지만

나의 경주여행 이야기


때때로 찾아오는 사치스러운 순간들이 있다. 점심시간, 좋아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맞은편에 붙은 명화 포스터를 보며 멍해지는 순간, 한낮의 열기가 적당히 식어가는 여름 저녁, 한강을 오른편에 두고 자전거를 타는 순간 같은 것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의 ‘사치스러울 정도로 행복한 순간’의 팔 할은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마주한 장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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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연휴를 맞아 혼자 떠나는 여행을 계획했다. 그해에는 유독 ‘북캉스’라거나 ‘북스테이’ 같은 단어가 눈에 띄었고, 책문화를 좋아하므로 여행의 방향은 자연히 정해졌다.


 ‘그래! 북스테이를 해보자. 많은 것을 눈에 담겠다는 욕심 없이 여유롭게, 흘러가는 대로 시간을 보내야지.’


그렇게 몇 개의 키워드를 두드려가며 방방곡곡에 숨어있는 북스테이 숙소를 찾아보다, 한 곳에 눈이 멈추었다. 노란 육각형에 달팽이 한 마리가 그려진 로고와, “느리게 음미하는 여행의 본질을 존중하는 여행자 숙소”라는 소개말이 인상적인 게스트하우스였다.


경주에서의 2박 3일은 오로지 이 숙소에서 시작되었다. 적당히 어둑어둑하며 잔잔한 노래가 흐르는 1층의 라운지 공간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자그마한 이야기를 나누기 좋았다. 나는 주로 고양이 ‘달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숙소에 머무르지 않을 때는 찾아두었던 경주의 책방 두세 곳을 목적지로 정하고 뚜벅뚜벅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숙소


한낮에는 꽤 더웠기 때문에, 객실 정리가 마무리될 오후 4시 무렵 숙소로 돌아가 한 시간 정도 낮잠을 자고, 저녁에 다시 활동을 시작했는데, 하루를 이틀처럼 보낼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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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달콤한 낮잠으로 에너지를 보충한 뒤, 라운지로 내려가 맥주 한 캔과 과자 한 봉지로 저녁을 때우고 있을 때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사장님과 일행 두 분이 라운지로 들어오셨고, 4캔 만 원의 맥주를 사 왔다며 남는 한 캔을 나에게 권했다.


취기에 살짝 달뜬 상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앞에 계신 분이 경주의 매력에 반하여 주중에는 서울에서 생활하고, 주말에는 경주에 내려와 맥주 보틀샵을 운영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가까우니까, 다음에라도 꼭 한 번 와요.”


내일이면 서울로 돌아가야 했기에, 다음에 경주에 오면 꼭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홀로 밤 산책에 나섰다. 곳곳에 높이 솟은 왕릉 사이를 걷다가 문득, 그 보틀샵을 검색해봤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서 ‘#경주혼술’을 검색했을 때 보았던 곳 같았다.


순간,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이 아니라, 지금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판단 덕에 나는 말도 안 되는 분위기의 맥줏집에서 말도 안 되게 맛있는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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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지난 2년 동안 네 차례 더 경주로 향했다. 친구와 함께일 때도 있었고, 혼자일 때도 있었다. 대체로 노란 달팽이가 그려진 곳에 묵고, 저녁에는 주말에만 문을 여는 그 보틀샵으로 향했다. 보틀샵은 어느새 확장하여 근처에 만화책 펼치고 ‘ㅎㅎㅎ’ 웃으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근사한 공간이 생겼고, 최근에는 초록 풍경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탭룸이 문을 열었다고 한다. 7월에 무조건 가야지. 앗, 마음의 소리가 텍스트화되어버렸다.

그 맥줏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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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느낀 가장 사치스러운 순간이 언제인지 떠올려보았는데, 경주의 바로 그 보틀샵에서 사랑하는 사우어 맥주를 한 병 사다가, 옆 공간으로 건너가서, 사장님이 구워주신 군만두를 소중히 받아 들고, 만두 한 점, 맥주 한 모금, 책 한 페이지를 보았던 그 장면이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이쯤 되니, 마치 맥주를 마시러 경주에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그것은 오해다. 곳곳에 널린 유적을 보며 등산을 할 수 있는 경주 남산에도 올라야 하고, 자전거를 빌려다 첨성대를 지나 국립경주박물관에도 가야 하며, 아침에는 안개가 자욱한 횡성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오후에는 향미사에서 어마어마하게 향긋한 드립 커피를 마시거나, 노워즈의 창가 자리에서 꼬수운 라떼를 한 잔을 마셔야 한다. 조용하고 따스한 누군가의 책방에 가는 길, 무열왕릉을 한 바퀴 걷는 것도 좋다. 아, 황룡사지의 일몰도, 월정교의 야경도 잊어선 안 된다.

경주의 장면들

 



분명 나에게도 시간표를 짜고 여행을 하던 시간이 있었는데, 이제는 여유 속에서 생겨나는 공간에 대한 궁금증과, 마주치는 사람들에게서 전파되는 장소에 대한 호기심이 여행의 궤적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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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또 올게요.’ ‘여긴 진짜 자주 가야지.’ 하는 다짐이 공허할 때가 많다. 어떤 공간을 여러 차례 찾기란 생각처럼 쉽지가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역으로, 일정 시간이 되면 시간을 내서라도 가야만 하는 이런 공간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음, 아무래도 경주에 갈 때가 되었나 보다.




추신, 글에 나오는 숙소는 '게스트하우스 딮'이며, 보틀샵은 ‘위캔드커먼’, 탭룸은 ‘ㅎㅎㅎ’입니다. 내돈내산임을 진지하게 밝히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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