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새란 Oct 25. 2021

결혼이라는 미래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소 짧아진 혀로 뱉어내고 있는 내 모습을 자각할 때, 조금 징글맞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는 이런 징글맞은 내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여겨주는 사람에게 새삼스러운 감사와 사랑을 느낀다.


“신뢰 깊고 좋은 관계에서는 ‘정상적 퇴행’이라는 게 있어요”


얼마 전 유튜브에서 본 영상에서 오은영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가끔의 ‘정상적 퇴행’을 통해 의존적 욕구를 채우면 편안함과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는 맥락이었다. 이 짧은 영상 클립 덕에 나의 징글맞음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우리는 신뢰 깊고 좋은 관계구나! 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어쩌면 사랑이란, 갑자기 어리광을 부리는 상대를 보며 왜 갑자기 혀가 짧아졌냐고 놀리거나, 놀라거나, 노(怒)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

미간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놓을 때나, 실없는 농담을 건넬 때나, 짧아진 혀로 ‘머하고 이썽’ 하고 질문을 던질 때, 상대가 가진 감정과 성격의 스펙트럼을 이해하고 적절한 온도와 미소를 돌려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C를 만나고 나는 자연스럽게 결혼이라는 미래를 그리게 되었다.


음. 결혼이라니.


-

너무도 막연하던 것을 조금씩 실현해가는 시간 속에 있으니, 요즘은 대체로 차분하지 못한 상태다. 결혼할 사람을 만나, 결혼을 준비하고,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사는 과정은 얼마나 쓸 것이 많을까, 하는 가당찮은 기대도 있었는데 역시나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멍-하니 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생각과 감정은 알록달록 총천연색의 오로라 같은데, 손에 잡히지 않으니 텍스트로 풀어내기는 역부족이다.


관심 밖이던 것에 손을 뻗어 내 눈앞으로 끌어온 다음,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하는 시간이 가득하다. 각자가 알아보고, 공부하고서, 함께 고민하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 끝이 없다. 그렇다고 그게 둘만의 선택도 아니니 결재서류가 반려 당하면 다시금 선택지를 검토하고 보고서를 써야 하는 일도 생긴다.


선배님들이 보신다면 이제야 첫 페이지를 넘기는 마당에 엄살이 심하다 싶겠지만, 고백하건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결혼식의 모양새를 만들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하다. 아니 사실 원하는 모양새가 뭔지도 잘 모르겠다. (해본 적이 있어야지!)


각 절차에는 선택지를 구성하기 위한 선택지가 수백 가지이고, 그 선택지가 옳은 것인지, 우리가 원하는 방향인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짚어보지 않으면 우리의 배는 망망대해를 표류하게 될 것만 같다. ‘딴딴따단-’ 하며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 수백 가지의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테니, 어디 맛 좀 보라고 결혼식이라는 행사를 하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

사실 이 글을 처음 쓸 때만 해도 우리 앞에 놓인 수십 가지의 퀘스트가 낯설고 어렵긴 해도 일단 너무 재미있었다. 둘이 대형 프로젝트를 하듯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선택하는 과정은 나름 때때로 성취감도 안겨줬다.


그런데 며칠이나 지났다고 조금 지쳐버렸다. 주말 내내 발품을 팔고 돌아다녀도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어서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이번 주 에세이 드라이브 마감도 못 지키겠구나! 이 작지만 큰 약속 덕분에 잠시 날이 선 생각의 모터를 끄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복잡다단한 상황 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이렇게라도 남겨본다.


또 며칠이나 몇 주가 지나고 나면 ‘어우 이렇게 머리 아프던 때도 있었구나’, 하고 웃으며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아니 그러기를 바라니까.



ps. 실제로 몇 달이 지났고.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매거진의 이전글 그 단어, 제가 좀 빌리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