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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Oct 25. 2021

그 단어, 제가 좀 빌리겠습니다.

안온함에 대하여



 타닥타닥, 불규칙한 소리를 내며 불은 잘도 타올랐다.


 이내 '멍-' 아무런 잡념도 떠오르지 않았고, 주변의 소리도 옅어졌다. 가만히 불길을 바라보고 있으니, 최선을 다해 타오르고는 부는 바람에 모양과 색을 맡기는 모습이 참 신비로웠다. 불길은 스스로를 틀 안에 가두는 법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한참을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 매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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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D랑 있으면 '안온하다'라는 느낌이 들어"

 쌀쌀해진 저녁, 옹기종기 불 앞에 모여 앉은 우리는 약간의 취기와 따뜻한 온기를 핑계 삼아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탁월한 진행자인 H언니*는 ‘각자 연인의 어떤 점이 좋은지 형용사로 표현해보자.’라고 제안하고는, 본인이 가장 근사한 답변을 내어놓았다.


 안온이라니. 안정적이고 온전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존재라는 의미인가. 하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후에 사전을 찾아보니 안온(安穩)은 편안 '안'에 편안할 '온', 조용하고 편안한 상태로 정의되는 단어였다. 각자 몇 개의 단어를 내뱉었지만, 마음속에 남은 ‘안온’이라는 단어를 한참 곱씹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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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은 우리의 첫 캠핑 날이었다. 결혼 준비를 하느라 심신이 지쳐있었고, 더 추워지기 전에 오랜 시간 꿈꿔왔던 차박에 도전하고 싶었다.  


 이제 와 고백하자면, 사실 캠핑은 '긴 시간 차를 타고 달려 가만히 앉아서 먹기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돈과 시간을 들여서 가만히 배를 채우는 지루하고 몸이 근질거리는 일.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성격을 가진 나에게는 거리가 먼 취미일 거라고 단언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맘대로 정의 내리는 일이 얼마나 현명치 못한 일인지 이제는 안다. 그래서, 해보기로 했다. 캠핑을 해보고 싶다던 남자 친구 C의 반짝이는 눈이 가장 큰 동력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일단 해 봐야지. 작년에 호기롭게 사들였던 백패킹 장비를 당근 마켓에서 하루 만에 팔아 차박용 기본 장비에 투자했다. (그렇다고 아직 백패킹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다)


 거기까진 했는데, 캠핑에 가기 위해 대체 어떤 것이 더 필요한지, 캠핑장은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아는 게 없었다. 호기롭게 장비를 샀던 감성 세포는 몸을 뒤로 숨기고, 냉철한 이성 세포가 자꾸만 ‘잘 생각해 봐. 이렇게 준비 없이 가서 네가 생각한 그림처럼 편안히 쉬고 올 수 있을 것 같아?’ 하며 주저함을 불러왔다.


 그 무렵, 매주 글쓰기를 위해 만나고 있는 HD커플이 차박 캠핑을 시작해 몇 차례 실전 경험을 쌓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일단 같이 가자고 했다. 부족한 건 같이 쓰고, 경험을 토대로 조금씩 필요한 것을 보완하면 된다고.


 아니, 이렇게 흔쾌히 동반 캠핑을 제안하시다니. 든든한 마음으로 그러기로 했다. C와 HD커플의 결혼식에 함께 가 눈인사를 나눈 것 외에 이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였지만, 내가 매주 만나 함께 글을 쓰는 이들과 나의 남자 친구가 잘 어울릴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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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핑이 가만히 앉아만 있는 일이라고 감히 누가 말했던가. 우리는 캠핑장에 도착하자마자 뙤약볕 아래서 1시간 30분 동안 텐트를 쳤다. 하루 일찍 와서 여유를 즐기고 있던 HD커플이 돕겠다고 나섰지만, 둘이서 해보겠다고 꾸역꾸역 관중석에 앉혀두고는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썩 심심하시다면 우리 의자 좀 조립해달라고 부탁하긴 했다)


 "이제 좀 앉아요. 자 맥주!"


 마지막 망치질이 끝나는 타이밍에, HD커플은 황금 같은 맥주를 내밀었다. 진짜 여유를 좀 즐겨볼까 하는 순간이 오자, 나의 산만함이 고개를 들었다. 이것만, 아니 저것만, 아니 요것까지만 더 하고 쉬어야지 하며 몇 차례나 엉덩이를 떼고 왔다 갔다 정신없이 굴었다.


 “자기, 급할 거 없어. 일단 앉아서 숨 좀 돌리자.”


 결혼 준비를 하면서 스스로 가장 많이 깨달은 점이 ‘나 성격이 참 급하구나.’인데, 캠핑에 와서도 노심초사 정신없이 굴고 있었던 거다. C의 다정한 한마디 덕에 나는 얼마간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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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저녁 언니가 내뱉은 ‘안온하다’라는 단어는 첫 캠핑에서 예상치 못하게 받은 선물이었다. (물론 언니의 남편인 D에게 한 말이지만) 하루하루 선택에 치이며 지쳐가고 있던 나에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안온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C를 통해 내가 얻는 것 역시 안온함이란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 힘든 일을 내뱉는 나의 말을 한참 듣고는 이제 스위치를 꺼도 괜찮다고 이야기해주는 것이나, 결혼 준비를 하며 저 멀리 앞서 달리려고 하는 나의 손을 꼭 잡고 일단 이것부터 생각하자. 하고 말해주는 것이 그랬다.


 급한 내 성격이 느긋해지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때때로 편안한 순간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뭐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 3년 전, 나는 H언니가 꾸린 독서모임에 창단 멤버로 합류했다. 책을 깊이 읽고 생각지 못한 질문을 던지곤 하던 언니는 여전히 모임을 이끌고 있고, 모임에서 만난 D와 얼마 전 결혼했다. 우리는 매주 목요일 만나 글을 쓰며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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