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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Oct 14. 2021

잃어버린 한마디를 찾습니다

┃ 안녕하십니까.


 하고 시작하는 메일을 아무런 표정 없이 써 내려가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 너무 기계 같잖아?’ 그건 정말이지 기계 같은 움직임이었다. "어느 부서의 누구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는 "메일 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 혹은 "전화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는 도입부를 덧붙이거나 "다음 주 홍보계획 제출 관련입니다."라며 바로 본론을 내밀기도 한다.


 최대한 간단하게, 하지만 마감 기한이나 꼭 확인해야 하는 내용은 가능한 눈에 띄게 작성해서 볼드 처리까지 하고 나면 다시금 아까의 그 기계가 다시 찾아온다.


┃그럼 확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ㅇㅇ 드림



 음, 뭔가 달라졌다. '뭐가 달라졌지?' 하고 생각하다가, 곧 깨달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9년이 다 된 지금, 나는 친절함을 잃어버렸다.


 과거의 나는 얼굴을 알든 모르든, 업무 메일을 주고받을 때 상대의 기분을 생각했다. 최소한 "그럼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라거나, 월요일이라면 "활기찬 한 주 보내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덧붙였고, 만약 이맘때 메일을 보낸다면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며 웃는 이모지:)도 하나 붙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떤가. 내 기분과 상태가 더 중요하다. 얼마나 바쁘고, 어떤 현안이 있는가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자 그때의 내가 그리워졌다. 무의식적으로 인터넷 창을 열고는 포털에 로그인했다. 사회생활을 프리랜서 방송작가로 시작한 덕에 나는 업무용으로 포털 메일을 사용했고,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주고받은 천여 통의 메일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다.

 

 보낸 메일함에 들어가 무작위로 메일을 클릭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라 생각했는데, 사회초년생이던 나는 지금보다 더 꼼꼼하고, 친절했다. 분명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텐데, 즐거운 하루를 보내시라며 타인의 하루를 응원했다. 물론 모든 문장에 영혼이 듬뿍 들어가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처럼 보였다.


-

 "명절은 잘 보내셨어요?"


 5일간의 추석 연휴를 보내고 출근했다. 주변 사람들과 간단히 안부를 나눈 후 멀뚱멀뚱 사무실 책상에 앉았다. 천천히 업무로 복귀하던 중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듣고서 찾아보니 담당업무가 아니라서, 담당자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주임님, 안녕하세요. 혹시 느린 우체통 담당자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저희 부서로 전화가 왔는데, 찾아보니 16년 조성 당시에 A부서가 담당했더라고요."


 몇 차례 업무를 함께 해서 친숙한 느낌이 드는 A부서의 주임님은 확인해보겠다며 전화를 끊었고, 잠시 후 메신저 창이 깜빡거렸다.


▷ 주임님! 말씀하신 건 담당이 B부서로 이관되었더라고요. 담당자 찾아서 처리 요청했습니다!

▶ 아 네 주임님! 감사합니다. 참고할게요!

▷ 네 감사해요 주임님. 추석에 고향은 다녀오셨어요?

▶ 아이구, 제가 명절 인사도 없이ㅜㅜ 저는 잘 다녀왔어요, 주임님도 명절 잘 보내셨나요?


 아차 싶었다. 목적이 뚜렷한 연락이라도 꼭 안부 인사를 먼저 했던 때가 있었는데, 아무리 업무 중이라 하더라도 긴 연휴 끝에 하는 연락이라면 간단한 인사는 붙일 수 있었을 텐데, 생각이 짧았다. 그렇게 각자의 고향은 어디인지 물으며 간단히 안부 인사를 마치니 다시금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째서, 오랜 단골인 게스트하우스에 문자를 보내어 예약하거나, 인스타그램 와인샵 계정에 사고 싶던 와인의 재고가 있는지 물어보려 DM을 보낼 때는 잘도 튀어나오는 친절이, 업무에서는 이만큼이나 힘든 일이 되어버린 것일까.


 ‘판에 박힌 인사치레 한 마디가 뭐 그리 중요하냐’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말이라도 진심이 담긴다면, 백 중 한두 명은 잠깐이나마 웃음 짓지 않을까. 그 짧은 한마디를 덧붙이기 위해, 오늘의 날씨는 어떤지, 상대방의 업무량이나 컨디션은 어떤지를 잠시나마 떠올려보아야 하니까.


 내일부터는 다시, 메일의 끝에 덕담을 한마디 매달아 보아야겠다. 날씨가 꽤 추워졌다거나, 오늘은 비가 온다고 하니 우산을 꼭 챙기시라거나, 많이 바쁘실 텐데 끼니는 거르지 마시라고.


 진심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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