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고개'라 불리는 작은 오지마을, 나의 외갓집

어렸을 적 내 기억 속에 경운기 타고 가요~

by 이새란




“다다다다다다다다다”

저 멀리서 그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세상으로 갈 때가 다 되었다는 의미였다. 아스팔트 도로를 매끄럽게 달려온 차는 산 아래 세워 두고, 비장한 각오로 주황빛의 머리를 가진 탈 것에 몸을 실을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험난한 산비탈을 요란스럽게 우당탕거리며 오르는 경운기는 산 중턱에 자리한 오지마을에 입장하기 위한 우리 가족만의 이동 수단이었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가며 30분가량 가파른 산을 오르면 자그마한 마을이 나타났다. 아니, 모락모락 연기를 내는 집은 한 가구밖에 없으니 마을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겠다. 그래도 곳곳에 폐가가 자리한 모양을 보면 엄마가 열 살 국민학생이던 시절에는 아마도 곳곳에서 밥 짓는 냄새가 가득했으리라 상상해본다.


그곳은 진정, 새로운 세상이었다. 가져간 휴대전화는 터지질 않아 꺼두어야 하고, 인터넷을 할 수도 없었다. 동그란 접시를 달아 텔레비전을 보는 게 유일한 문명이었다. ‘삭고개’라고 불리는 작은 오지마을, 그곳이 나의 외갓집이었다.

나의 외갓집, 삭고개의 풍경 (2011)



-

어딘가에서 소여물을 끓이거나, 밭을 손질하거나, 누에에게 뽕잎을 주거나 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계셨을 외할머니는, 늘 버선발로 마중을 나와계셨다. 작은 체구의 외할머니가 우리를 발견하고 두 손을 들어 올리며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통통 튀느라 얼얼해진 엉덩이를 툭툭 털고 경운기에서 내려 반갑게 달려가곤 했다.


“밥은 살 안 찐다. 반찬이 살찌지.”


나의 외할머니, 조달순 여사를 떠올리면 그 작고 야윈 손으로 한가득 퍼담아주시던 고봉밥이 떠오른다. 명절이건 아니건 쉼 없이 꺼내어 주시던 조기구이나 나물 같은 건강한 반찬들과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던 하얀 쌀밥.

우리에겐 할 것 없는 시골 마을이었던 삭고개에서, 외할머니는 항상 바쁘게 이곳저곳을 다니셨다. 그래서인가, 외할머니와 진득하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기억은 거의 없다. 낮에는 종일 TV만 보았고, 가끔 너무 안 움직였다 싶으면 오빠와 커다란 눈을 끔뻑이는 황소나 일자 눈을 뜨고 멍하게 우리를 바라보던 까만 염소를 구경하러 갔다.


대신 엄마와 외할머니가 대화를 나눌 때는 찰싹 달라붙어 귀를 기울였던 기억이 난다.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훨씬 많았지만, 힘들지만 묵묵하게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늘 바빴던 할머니와 이모들 (2011)



-

"에취!"


외갓집에 가면 쉴 새 없이 재채기가 쏟아졌다. 흐르는 콧물은 막을 수 없었고, 눈코입이 팅팅 부어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깊은 산속 공기 좋고 물 맑은 동네에서 알레르기에 괴로워하는 딸을 보며 아빠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끔 괜찮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괴로워하며 보냈다. 지내다 보면 괴로움 자체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처음엔 흙먼지 알레르기인가 했으나,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오랜 시간 장롱에 묵어있던 이불의 미생물 알레르기였던 것 같다. 요즘도 가끔 묵은 이불을 꺼내면 재채기를 쏟아내곤 하니까.


-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삭고개에는 거의 가지 않는다. 지금은 외삼촌이 홀로 남아 산골짜기를 지키고 계신다.

끊임없는 재채기에 괴롭고, 벌레도 많고, 인터넷도 못 하는 외갓집이 때때로 그립다. 외할머니의 사랑만큼 따뜻하고 양에 넘쳤던 고봉밥과 친척들로 북적이던 그 시간을 다시 마주하기 어렵다는 걸 아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의 단잠을 얼마든 깨워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