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슈퍼에서 만나
나는 담배 이름을 줄줄 외는 초등학생이었다.
90년대 중후반, 만나슈퍼에서 제일 잘 팔리는 담배는 ‘디스’와 ‘디스플러스’였다. 종종 젊은 사람들은 ‘말보로 레드’를,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한 갑에 200원인 ‘솔’을 보루째 사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에쎄’ 시리즈가 잘 팔렸다. 그 담배는 츄파춥스를 와작와작 깨어 먹고서 꾹꾹 씹게 되는 막대기처럼 얇았다. 손님이 계산 직후 돌돌 비닐 포장을 벗겨 얇은 담배 한 개비를 쏙 꺼내는 장면이 신기해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초등학생이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엄마는 구멍가게 사장님이었다. 슈퍼에서 시작해 문방구, 옷가게를 거쳐 다시 슈퍼를 운영하셨는데, 덕분에 방과 후에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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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슈퍼’는 우리 가족의 첫 가게였다. 살고 있던 작은 아파트 단지 앞, 나지막한 상가건물에 있었는데, 그 건물의 터줏대감이던 식당 ‘만나정’ 옆이라 이름 짓기는 수월했을 것이다. 아빠와 엄마가 머리를 맞대고, 간판에 들어갈 로고를 직접 디자인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을 기호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겨울의 만나슈퍼는 꽤 추웠고, 엄마와 나는 종종 카운터에 마주 앉아 난로에 꿀호떡을 데워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는 가수 조관우의 오랜 팬이라, 슈퍼에서는 주로 조관우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요를 좋아한 나는 ‘가요톱텐’이 하는 시간에는 꼭 TV를 틀었고, 춤추고 노래하는 베이비복스 언니들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가끔 엄마가 많이 피곤한 시간에는 직접 가게를 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기껏해야 초등학교 고학년이거나 중학생이었을 때다. 지금은 흔히 비치된 바코드 리더기도 없었으니, 계산을 위해서는 가격을 외우거나, 붙어 있는 라벨을 재빨리 확인해야 했다. 뼛속까지 문과생인 나는 한두 개의 물건을 팔더라도 꼭 계산기가 필요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창고에서 쉬고 계신 엄마를 불렀다. 열에 열은 현금으로 결제를 하던 시절이었으니, ‘땡’ 소리가 나는 금고의 문을 여닫는 일은 경쾌한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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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그마한 점빵에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중 기쁜 마음으로 도맡아 했던 일은 상품 진열이었다. 엄마의 지시에 따라 창고에서 과자나 라면을 꺼내어 공간을 채우는 작업이었다. 꺼내온 새 박스의 테이프를 주욱 뜯으면 물건들이 가지런히 열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바로 가격표 붙이기. 빨간 가격 라벨기를 판매 가격으로 세팅하고 착착, 기계처럼 가격을 붙였다. 마지막으로 빈자리에 예쁘게 진열하면 할 일은 끝났는데, 지금 돌이켜봐도 그 일은 아주 적성에 맞았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엄마, 슈퍼에서 진열하는 일 하려면 장래희망에 뭐라고 써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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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시간에는 농협에서 은행원 두 분이 가게에 들렀다. 엄마는 현금을 조금씩 그들에게 건네었는데, 그게 그 시절의 적금법이었다. 상인들이 은행에 갈 시간이 없었으므로, 은행원이 직접 시장과 상가를 돌며 적금을 받으러 다닌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엄마한테 여쭤보니 아마 매일 오셨을 거란다. 정해진 금액 없이, 그날그날의 벌이에 따라 오천 원, 만 원, 돈을 모으는. 지금은 떠올리기 어려운 방법으로 엄마는 차곡차곡 통장을 채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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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자로 오랜 세월 가게를 지킨 엄마는 내가 고3이던 무렵, 가게를 정리하고 직장으로 일터를 옮겼다. 약 15년이 흐른 지금까지 엄마는 한 직장에 몸담고 계시는데, 지금의 엄마를 보면 구멍가게를 일구어 나가던 시간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글을 쓰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찍이 잠자리에 드는 엄마는 오늘도 아홉 시에 잘 채비를 마치셨다고 했다. 글을 쓰는 동안 어렴풋이, 엄마가 지내왔을 시간이 생각보다 더 외롭고 때때로 더 강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인사를 건넸다.
“엄마 고생 많이 했네요. 어서 주무세요.”
2021년 7월 5일에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