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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May 25. 2022

숨구멍이 필요해


우리는 그 시간을 '숨구멍'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시작은 후르츠산도가 유명한 자그마한 카페였던 것 같다. 회사이기만 했던 을지로가, 끼니를 때우는 것에 급급했던 점심시간이, 그날 이후로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숨구멍'은 매주 수요일의 작은 일탈이었다. 당시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수요일마다 1시간 30분의 점심시간이 주어졌다. 평소보다 30분 긴 점심시간을 즐긴 날에는 퇴근도 30분 늦어졌지만, 점심시간의 작은 여유는 생각보다 큰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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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근처에 이런 곳이 있는데, 가볼래요? 인스타그램에 엄청 자주 올라오더라고요.”     


첫 숨구멍 회동은 그 한 마디로 시작됐다. 평소 부서 또래 직원들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회사 한편에 마련된 여직원 휴게실에서 각자 챙겨 온 도시락을 먹거나, 지하 1층의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나는 주로 편의점 도시락이나 컵라면과 삼각김밥 같은 것들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서는 회사 근처의 카페에서 커피를 픽업해오는 정도가 우리의 점심 일상이었다.     


그러니 그 제안은 솔깃하고 반가웠다. 날이 조금씩 풀려가는 늦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무렵 을지로는 ‘힙지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낯설지만 궁금한 곳이 하나둘 생겨났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모두 비슷한 마음이었고, 기꺼이 카페 투어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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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온 수요일, 평소보다 들뜬 마음으로 밥을 호다닥 먹고서, ‘힙’하고 ‘핫’하다는 카페로 향했다. 웬만큼 이름난 곳이라 하더라도 평일 점심에 붐비는 경우는 드물었으니, 우리는 카페에 앉아 색색의 과일이 콕콕 들어찬 예쁜 케이크를 먹으며 색다른 점심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나오니까 너무 좋네요.”

“이제 어디 가서 회사 을지로 근처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저 지금 뭔가 숨 쉬는 기분이에요.”

“오 저도요! 우리 수요일마다 이렇게 나올까요?”

“좋아요! 단톡방 이름 바꿔야겠다. 숨구멍 어때요. 숨구멍.”

“딱인데요? 저도 바꿀래요! 크크크”     


일주일 중 딱 하루, 점심시간이 단 30분 늘어났을 뿐인데, 일상이 조금씩 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건물들을 한층 한층 올려다보게 되었고, 을지로 곳곳에 새로이 생겨나는 공간의 정보에 귀 기울였다. [숨구멍] 채팅방에는 각자 발견한 카페 정보가 올라왔고, 우리는 매주 수요일 한 곳을 픽해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가득한 인쇄소 골목골목을 누비며, 간판도 없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의 계단을 올랐다.     


‘정말 여기에 카페가 있다고?’ 하는 의심을 품은 채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구부정한 허리와 동그랗게 말린 어깨로 블루라이트를 뿜어대는 모니터를 주시해야 하는 사무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그렇게, '숨구멍'은 수요일의 점심시간을 넘어, 모임의 이름이 되었다.     


새로운 공간을 찾아다니는 일은 무료한 일상에 자극을 주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많아질수록 취향이라는 것도 생겼다. 비가 온 뒤 죽순이 자라는 모양새로 쑥쑥 생겨나던 가게 중에는 정말 매력적인 공간도 있었지만, 어딘가 비슷하고 개성이 없는 곳도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어떤 모양의 가구와 인테리어를 좋아하는지, 어떤 맛의 커피가 입맛에 맞는지, 어떤 디저트를 선호하는지를 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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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으로 회사를 옮긴 지금도, 공간 탐험은 계속되고 있다. 비록 숨구멍 멤버들과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이곳 역시 새로운 공간에 호기심을 품은 동료들이 있고, 우후죽순 생겨나는 가게들이 있기 때문이다. 목요일에 한 번씩 진행하는 글쓰기 모임은 ‘글 쓰는 공간 유랑단’이라 이름 짓고 을지로와 성수를 오가며 새로운 카페를 찾아다니고 있다.


‘프랜차이즈’라는 시스템에 엮이지 않은 크고 작은 상점들에서 풍겨 나오는 매력이 좋다. 생각해 보면 피드와 리뷰에서 예쁘게 찍힌 사진으로만 만나던 공간을 직접 방문했을 때 크게 만족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드물게 보석 같은 공간을 찾게 되면 진심으로 기쁘고 쉽게 감동한다. 그런 곳은 보통 사장님과 구성원의 손길이 하나하나 묻어 있는, 취향이 그대로 드러난 공간이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커피맛이 좋아 자주 찾는 카페에 가면 사장님의 책 취향을 알 수 있다. 예술과 문화에 관심이 많으시다는 사실도 공간에서 느껴진다. 그저 머무를 뿐인데도 ‘여행을 가면 꼭 미술관에는 가시겠구나. 도록을 사서 소장하시는 분이시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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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나도 그런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자그마하게 소망한다. 아주 감각적이지는 못하겠지만 나만의 취향이 담긴, 구석구석 손길이 닿은 그런 공간을. 일상에 지친 누군가에게 숨구멍 같은 쉼터가 되어줄 수 있는 그런 공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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