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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May 23. 2022

매출 0원의 아르바이트생

우뚝 선 채로 커다랗게 넘어졌던


이 글을 읽으시는 동안 잠시 기억을 되새겨주시기를 바란다.     


2007년 12월, 혹시 거제도에 가셨던 분이 계신다면 손을 들어주시길. 맞다, 그 거제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 다음으로, 당시 거제도에 갓 생긴 유일한 백화점, ‘오션백화점(現 디큐브 거제)’에 방문하신 분이 하필 혹시나 계신다면 계속 손을 들고 계시길. 이제 마지막이다. 하필 크리스마스 시즌, 그 백화점에서 쭈뼛거림을 온몸으로 표출하던 아르바이트생을 보신 분이 만에 하나 계신다면, 그 손 내리지 말고 그 길로 나를 찾아 위로의 하이파이브를 해주시길.     


‘이게 뭔 소리야?’ 하며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계신다면, 일단 그 미간부터 풀고 이 인사를 받으시면 된다.     


“고맙습니다. 저의 예순여덟 번째 흑역사를 목격하지 않으셨군요.”          


-

첫 아르바이트는 백화점 매장의 판매 사원이었다. 당시 수능을 마친 친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아르바이트의 세계에 뛰어들었고, 거제시 장평동에 있는 ‘오션백화점’에 가면 아직 학생 티를 벗지 않은 아르바이트생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다들 아르바이트 경험이 거의 없었을 텐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참 자연스럽고 능숙했다. 친한 친구는 1층 주얼리 매장에서 귀걸이를 팔았는데, 내 생애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 귀걸이는 아마 그 매장에서 샀을 것이다. (첫 번째 귀걸이는 귀를 뚫은 금은방에서 샀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1층 베네통 매장에서 급히 사람을 구한다기에 교복 셔츠에 까만 바지, 까만 니트 조끼를 입고 덜덜 떨며 매장을 찾았다. 자신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열아홉의 나는 그렇게 아르바이트 세계에 입문했고, 결과는 처참했다.      


처음에는 에스컬레이터 인근의 이벤트 매대에서 쭈뼛거리며 가방을 지켰고(그렇다. 팔지 못하고 그저 지켰다.), 나중에는 매장에서 쭈뼛쭈뼛 거리며 손님을 맞았다. 내 기억에 따르면, 매출은 0원이었다. 손님에게 어울리는 옷을 추천할 능력도, 능청스럽게 말을 꺼낼 깜냥도, 그때의 나에게는 없었다.     


크리스마스와 주말을 포함하여 약 3일 정도 일했던 것 같다. 연말연시 대목이 다가오니 사장님은 조금 더 같이 일하자며 몇 차례 전화를 주셨다. 뛰어난 언변으로 매출을 올리는 아르바이트생은 아니었으나, 요령을 피우지 않고 정해진 시간을 묵묵히 지켜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없던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일은 열아홉의 나와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거절의 의사를 밝혔음에도 계속 걸려오는 전화를 불편한 마음으로 애써 무시했던 기억이 난다.     


-

“저 멀리, 코앞 말고 먼 곳을 봐야지.”

“넘어지는 방향으로 핸들을 꺾어야 안 넘어진다.”     


자전거를 처음 배우던 날을 떠올려본다. 흔들리는 핸들을 꽉 잡고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수도 없이 넘어졌다. 이론은 단순했으나, 그 단순함을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체화하기 위해서는 넘어지는 과정이 꼭 필요했다.     


생각해 보면 2007년의 겨울은, 인생이라는 자전거에서 나를 지지해 주던 보조 바퀴를 떼어내던 시기였다. 다가올 봄, 홀로 상경해서 일상을 잘 굴리기 위해서는 수차례의 넘어짐이 필요했고, 오션백화점 베네통에서 우뚝 선 채로 커다랗게 넘어졌던 것이다.     


이후 지금까지 크고 작은 넘어짐을 반복하며 나라는 사람을 조금씩 알아간다. 어떤 부분은 인정하고, 어떤 부분은 바꾸어가며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때처럼 넘어짐에 무방비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춤을 추듯 앞구르기 한 번 하고 자연스럽게 일어날 줄도 안다.     


내 인생의 서른세 번째 봄, 아주 자연스럽게 일상의 자전거를 굴리며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 그날의 커다란 넘어짐 덕분에 시작되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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