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을 때, 부모님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앞가림을 해야 했다. 어른으로, 온전한 하나의 개체로 오롯이 서기 위해서는 그 단어가 꼭 필요했다.
사실, 방송작가로 일하는 2년 동안 경제적으로 온전히 독립하지는 못했다. 주급 35만 원을 받으며, 월세 40만 원에 관리비 10만 원을 내고, 조금이나마 모아보겠다고 적금을 들고, 힘든 일상을 술잔에 털어버리고, 생방송 날엔 택시를 타고 새벽같이 출근하는 일상을 지속하다 보면 잔고는 쉽게 바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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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 부모님은 꽤 분명하게 나를 말렸다. 버티기가 어려운 직업이고, 일상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저 소심하고 무른 딸내미가 막연히 꿈을 키워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불안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한차례의 분명한 반대에도 뜻을 굽힐 기색이 없자, 그 이상 말리지는 않으셨다. ‘할 수 있으면 해 보고 결정해라.’ 하고 그저 내버려 두었을 뿐이다.
용돈 좀 부쳐달라는 전화는 그래서 더욱 어렵고 슬펐다. ‘나는 분명히 치열하게 일을 하고 있는데, 왜 부모님께 아쉬운 소리를 하는 순간이 찾아오는 걸까.’ 괴로움에 말 꺼내기를 망설이고 있으면, 부모님은 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마냥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일하는 동안은 얼마든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부모로서 자식이 필요로 할 때 원하는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의 기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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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을 때, 부모님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그때는 스스로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꿈을 이루었다는 기쁨의 도취는 2년을 넘기지 못했다. 미래를 올려다보면, 닮고 싶은 선배나 가고 싶은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일의 재미와는 별개로 직업에 회의가 몰려오기도 했다.
그렇게 고민 끝에, 인생 첫 취준생이 되기로 했다.
분명히 기억하는데, 대학생 때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필수 스펙은 ‘토익’이었고, 가장 싫어했던 단어는 ‘스펙 쌓기’였다. ‘방송작가는 그런 스펙 필요 없어.’라는 어린 오만함에서 비롯된 배려 없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인생 첫 취준생으로 새로 태어난 나는 토익 학원부터 등록했다. 숫자 세 자리가 외국어 실력을 증명한다는 것에 괜한 반항심 같은 것이 있었는데, 막상 해야 하는 순간이 오니 잘하고 싶었다. 첫 수업 전날에는 완벽한 취준생으로 거듭나기 위해 취업 전문 사진관에 가서 정장을 빌려 입고 증명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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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입구역에서 강남역까지, 출근하는 직장인 틈에 끼어 학원으로 향했다. 일찍이 시작하는 수업을 듣고는 어두워질 때까지 학원에서 구성해 준 조원들과 스터디를 했다. 밤이면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그 술집이, 낮에는 학생들의 스터디 공간으로 사용되는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코인 노래방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룸 술집에서, 종이가 쩍쩍 달라붙는 책상에 앉아, 우리는 기출문제를 풀고 단어 시험을 봤다.
토익학원은 2개월 과정이었는데, 첫 달 시험에서 915점을 받았다. 숫자 세 자리가 내 영어 실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취업으로 가는 하나의 관문은 넘은 기분이 들었다. ‘간절한 맘으로 매일 노력하면 되기는 하는구나.’ 토익을 끝내고서는 토익 스피킹 학원에 등록해 적당한 스펙을 한 줄 더 얻었다.
훈장 같은 점수를 쌓아 두고 나니,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막막함이 앞섰다. 방송작가를 그만둘 때 구체적으로 다음 스텝을 생각해 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공공기관에서 일하고 싶었다. 불확실한 미래와 불안정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안정감’과 ‘소속감’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당시 그 기준에서 프리랜서의 대척점은 공공분야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표류하다 킨텍스에서 열린 ‘공공기관 채용정보 박람회’로 향했다.
그때까지 채용 박람회는 뉴스 화면에서만 보던 곳이었다. ‘역대 최대의 취업난’ 따위의 제목으로 기사가 보도될 때, 빼곡하게 인쇄된 채용공고를 집중해서 바라보던 취준생의 뒷모습 사진으로만 만나던 이벤트 정도로만 여겼다.
박람회장에 도착해서는 이름을 익히 아는 커다란 공기업부터 처음 보는 자그마한 공공기관까지 여러 부스를 오갔다. 다양한 분야를 오가다 보니, 나의 경력과 상황에는 공통적으로 필요한 자격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국가직무능력표준’이라는 뜻으로 새롭게 도입된 ‘NCS’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그렇게, 해가 바뀌는 기간 동안 자격증을 취득하고 스터디에 열심히 참여하며 여러 차례 원서를 냈다.
몇 차례 불합격 소식이 이어지던 2016년 7월, 나는 결국 채용 박람회에서 알게 된 공공기관에서 인턴으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4년 동안 계약직을 거쳐 그토록 원하던 정규직 직장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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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가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내 앞을 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015년 11월 21일, 취업 박람회에 다녀온 나는 인스타그램에 이 한마디를 남겼다. 앞가림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주었던 무게감을 깨달았고, 이상하게도 무거운 마음을 한 줄의 문장으로 적어내며 조금은 가벼워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스펙 쌓기’를 싫어하던 대학생은 그렇게 ‘스펙 쌓기’에 전념하는 취준생이 되어 주어진 일상을 살아냈다. 돌아보면 그 지난한 1년 2개월은 ‘해 봐야 안다.’는 인생의 진리를 다시 한번 체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ps. 그런데, 인생은 이상하게 흘러서 4년 뒤 직장을 옮기게 되는데..... to be cou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