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꼬마가 비를 맞고 있다. 자그만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서 세차게 퍼붓는 비를 맞고 섰다. 피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뽀송한 구석은 하나도 없는 걸 보니 꽤 시간이 흘렀으려나. 아니 이 정도로 쏟아지는 비라면 10초도 안 되어 저렇게 물에 빠진 새앙쥐꼴이 될 수도 있겠다.
아이는 웃고 있다. 시원하게 내리는 비가 하나도 꿉꿉하다거나 불편하지 않다는 눈치다. 아이의 엄마가 아파트 입구에 서서 어서 들어오라며 손짓하고 있지만, 아이는 약 올리듯 물웅덩이를 찾아 발을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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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남편과 오랜만에 집 뒷산에 오르기로 했다. 평소라면 용마산만 간단히 다녀왔을 텐데, 그날은 자전거를 타고 아차산 입구까지 간 다음, 아차산에서 용마산으로 넘어오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 아차산 입구에 다다랐을 때, 예정에 없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순간 당황했으나, 머뭇거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예정된 코스대로 등산한다면 대중교통을 타야 할 일도 없었고, 집에 돌아가려 해도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어떡할까?”
“그냥 가자!”
우리는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빗속 산행을 하기로 했다. 험준하고 높은 산도 아니었고,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밤낮으로 오십 번 정도는 오른 코스였기에 바위 구간에서만 조심한다면 위험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때때로 판초 우의를 걸치고서 일부러 우중 산행을 하기도 하는데, 덕분에 손쉽게 귀한 경험을 하겠구나 싶기도 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산을 오르는데, 어린 날의 그 장면이 떠올라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모자 끝에 방울방울 맺혀 떨어지는 빗방울이 마음을 둥글게 만들어주었고 산에 오르느라 붉어진 뺨을 시원하게 식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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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되고는 젤리슈즈를 샀다. 이사를 하면서 다 갖다 버렸는지 여름용 샌들이 하나도 없기도 했고, 비 내리는 날 운동화 앞코가 눅눅히 젖어들어 양말 발가락 부분에 얼룩이 생기는 것도 싫었다. 더 이상 비 오는 날 신발장 문을 열고 한숨을 쉬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젤리슈즈가 생기고 나니 비가 두렵지 않았다. 운동화를 사수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슬리퍼나 쪼리처럼 휙 하고 미끄러져 신발을 두고 발만 앞서 걸을 걱정을 안 해도 되고, 장화처럼 신고 벗다가 성격을 버리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가능한 출퇴근 시간만 피해서 비가 내려주길 바랐는데, 신발을 사고서는 빗줄기에 발이 시원하게 젖어드는 기분이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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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날은 긴 장마 중 하루였을 거다. 어린아이였던 나는 아파트 단지에서 내리는 비를 맞고 있었다. 비가 내려서 반가운 마음에 달려 나간 것인지, 어쩌다 쏟아지는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맞게 된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때 내가 아주 행복했다는 사실이다. 비에 젖은 옷과 신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생경한 감촉이 재미있었다.
이미 다 젖어버린 후에는 젖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가끔은 당연히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에 온전히 부딪혀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막상 부딪혀보면 굳이 피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거나, 자그마한 준비물 하나만 갖춰도 그 대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