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돌아오지 않을 계절

by seomar

창밖엔 겨울이 오고 있었다.
바람은 차고, 나뭇가지는 앙상했다.
사람들은 두터운 코트를 껴입고 바삐 걸었고, 카페 안은 김이 서려 따뜻했다.
하지만 수진의 손끝은 계속 차가웠다.

그녀는 이제 알았다.
온도가 사라지는 것이, 사람이 멀어지는 방식이라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어떤 온도는 끝내 식지 않는다는 것도.

그녀는 정우를 다시 찾기로 했다.


정우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몸은 거의 움직이지 못했고, 말을 하는 것도 어려워지고 있었다.
침대 옆에는 누런 스케치북 한 권이 놓여 있었고,
그 속엔 잘 그리지 못한 선들이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정우는 생각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구나.’

그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손이 떨려 글씨가 삐뚤어졌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았다.

"수진아.
나는 너한테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지?
그게 참 이상하지.
너를 그렇게 오래 바라봤는데, 한 번도 말하지 못했다는 게."

"하지만 난 너를 기억해.
햇살 아래에서, 창문 앞에서, 계란말이를 들고 서 있던 너를.
네가 남겨준 클로버 잎도 아직 있어.
그건 내 기억에서 한 번도 시들지 않았어."

"혹시라도 네가 이 편지를 읽게 된다면,
내가 끝까지 너를 밀어낸 게 아니라,
끝까지 너를 안고 있었단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이제 사라지지만,
너의 기억 안에선 살아있고 싶어.
그게, 나의 마지막 소망이야."


수진은 병실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문을 열까 말까, 그 짧은 동작조차 숨이 막혔다.

결국 문을 열었을 때, 정우는 눈을 감고 있었다.
창밖으로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고, 병실 안은 아주 조용했다.

“정우야…”

수진이 조용히 불렀다.

정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마치 언젠가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왔구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 말 한 마디에, 수진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왜… 왜 말 안 했어.
왜 혼자 다 감당하려고 했냐고…”

정우는 미소 지었다.

“그래도… 이렇게, 네가 오잖아.”

그 말이 너무 슬퍼서,
수진은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정우의 손은 차가웠고, 뻣뻣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따뜻한 무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나, 다 알았어.
네 병, 네 아버지 얘기, 왜 날 밀어냈는지도.
근데… 그런다고, 마음까지 멀어지는 건 아니었어.”

정우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옆에 있던 스케치북을 가리켰다.

수진은 그걸 펼쳤다.
거기엔 그림 하나가 붙어 있었다.

반지하 창문 앞, 햇살을 받고 앉아 있는 여자아이.
그리고 그 옆, 작고 연한 글씨.

‘기억의 끝에서, 너를 기다릴게.’

수진은 그림을 안고 울었다.
작고 조용하게, 그러나 아주 오래도록.


며칠 뒤, 정우는 세상을 떠났다.
고요하고 따뜻한 오후였고, 창문 너머로 바람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마지막까지 눈을 감은 채, 작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수진은 장례식장 한쪽에 앉아, 오래전 그 그림을 바라봤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 너 오래도록 기억할거야.
아니, 계속… 너 안고 살 거야.”


몇 년 후, 수진은 한 전시회를 열었다.
제목은 《기억의 끝에서》
그녀가 찍은 사진들과 함께, 한 남자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건 이제 세상에 없는 사람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기록이었다.

어느 관람객이 물었다.

“이 그림, 누가 그린 거예요?”

수진은 잠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누군가의… 오래된 사랑이요.”



이전 05화5화 선택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