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다시 만난 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조용한 날이었다.
늦가을.
노랗게 말라버린 은행잎이 골목을 메우고 있었고,
나는 그날, 괜히 집 근처 카페를 돌고 있었다.
그 카페는 우리가 함께 걷던 거리에 있었고,
아직도 간판 하나 바뀌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녀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수진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손에는 작은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내가 들어온 걸 알고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지후 씨."
나는 가만히 섰다가,
천천히 그녀 앞에 앉았다.
"잘 지냈어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침묵, 오래된 안부, 묵은 감정이 공기 사이로 흘렀다.
"정우 씨... 마지막 편지, 나도 읽었어요."
그녀가 먼저 꺼낸 이름에
나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어요."
내가 말하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나도, 그제야 알았어요.
정우가 나한테 왜 아무 말도 못했는지."
그녀의 손이 스케치북 위를 스치고 있었다.
"요즘은 뭐 해요?"
"사진 찍어요. 사람들, 표정, 그리고… 거리."
"그 사람도 그런 말 했었죠.
‘수진이는 사람을 담는 걸 잘한다’고."
그녀는 놀란 듯 나를 바라봤다.
"정우 씨가… 그 말 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나한테도 그런 말 했어요.
‘수진이는, 사진 찍을 때 세상을 안 울게 만든다’고."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
"지후 씨… 나 아직도 미안해요."
나는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그 말, 그날 이후 한 번도 듣고 싶지 않았는데…
오늘은 괜찮네요."
우리는 오래 말하지 않았다.
카페 안엔 잔잔한 재즈가 흘렀고,
창밖 은행잎은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날의 밤, 그녀의 편지, 그 모든 침묵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는… 그 사람의 기억 속에서 만났으니까."
그날 이후, 우리는 가끔 안부를 나누었다.
서로의 마음을 예전처럼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조용히 안부를 묻고, 조용히 웃을 수 있을 만큼
우리는 괜찮아졌다.
사랑은 끝났지만,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