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걷는 방식으로 하루를 안다고 믿었다. 발걸음이 빠르면 마음도 바쁘고, 멈칫하면 생각이 많아진다는 식으로. 그런데 오늘은, 내 발이 아니라 내 옆에 붙어 걷는 것이 먼저 말을 걸었다.
길 위에 늘어선 내 그림자였다.
아침에는 발끝에서만 짧게 고개를 내밀던 그것이, 해가 기울자 점점 길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아닌 누군가의 형태처럼 보였다. 어깨가 더 넓고, 팔이 더 길고, 고개는 약간 기울어 있었다. 마치 ‘내가 모르는 나’가 내 옆에서 같은 속도로 걷고 있는 것처럼. 나는 무심코 발을 멈췄다. 그림자도 멈췄다. 다시 한 걸음을 내딛자, 그림자도 따라왔다. 그 당연함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넌 늘 나였나?’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면 특별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버스 정류장 광고판이 반짝였고, 편의점 앞에는 흰색 플라스틱 의자가 쌓여 있었다. 어디선가 튀김 냄새가 바람을 타고 왔고, 신호등은 기계적으로 색을 바꿨다.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흘렀고, 나는 그중 하나였다. 딱 하나, 내 그림자만이 이상하게도 선명했다. 잿빛이 아니라 검은 잉크처럼 깊고 또렷했다.
그림자를 유심히 바라보는 내 모습이 누가 보기엔 우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이상한 확신을 느꼈다. 이건 그냥 빛의 결과물이 아니다. 어쩐지, 오늘의 내가 남긴 흔적 같은 것. 혹은 오늘이라는 시간에만 존재하는, 한 번 쓰이고 사라질 문장 같은 것.
‘오늘의 시제는…’
머릿속에서 문장이 자동으로 이어졌다. 마치 누군가 첫 마디를 던져놓고 내가 뒤를 받길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쩐지 그 다음 단어를 잘못 고르면 오늘이 통째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는 시제는 단순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현재는 지금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의 하루는 늘 그 셋이 엉켜 있었다. 방금 전을 후회하면서도 지금은 웃고, 내일을 걱정하면서도 오늘의 밥을 먹는다. 그러니까 하루란 사실, 시제의 혼합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혼합이 유독 또렷했다. 마치 누군가가 하루를 한 줄로 정리하라고, ‘너 오늘은 이 시제로 살아’ 하고 도장을 찍는 느낌.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발 아래 보도블록 틈새에는 겨울의 먼지가 끼어 있었고, 미세하게 갈라진 선들이 내 그림자를 잘게 나눴다. 그 조각난 그림자들이 이어져 하나의 긴 줄이 되자,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나의 연속이 아니라, 나의 편집본일지도 몰라.’
마치 책을 만들 때 원고를 모아 한 권으로 엮듯이, 내 하루도 여러 조각의 감정과 사건을 엮어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묶인다. 그렇다면 그림자는 그 제본선 같은 거 아닐까. 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오늘인지 모를 때, 조용히 범위를 긋는 것.
그때, 그림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흔든 것도, 바람이 심하게 분 것도 아니었다. 그저 순간적으로 형태가 찌그러지더니, 마치 고개를 돌린 사람처럼 내 쪽을 향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쿵 하고 뛰었다.
“너… 방금….”
내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내 귀에만 겨우 닿았다. 그런데도 나는 알았다.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이 하루 자체라는 걸. 그리고 어쩌면 오늘은, 내가 하루를 ‘살아내는’ 날이 아니라 ‘쓰는’ 날인지도 모른다는 걸.
나는 길가에 멈춰 섰다.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며 빛의 각도가 바뀌었다. 그 변화에 따라 그림자는 더 길어지고 더 진해졌다. 길어진 그림자의 끝은 내 발끝에서 멀어져, 마치 먼저 목적지에 도착해 나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끝을 따라 시선을 보냈다. 그림자가 닿아 있는 곳은 골목의 입구였다. 낮에는 그냥 평범한 지름길이었을, 밤에는 괜히 비밀 통로처럼 보이는 그곳. 골목 안은 어두웠고, 어둠 속에서 빛이 잘게 부서져 있었다. 간판의 네온이 반쯤 꺼져 깜빡였고, 누군가 버린 종이박스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평소라면 나는 굳이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내 그림자가 그쪽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정확히는 끌어당긴다기보다, ‘이쪽이 오늘의 문장이다’라고 가리키는 느낌이었다.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너무 소설 같아서. 아니, 맞다. 나는 소설을 쓰기로 한 사람이었다. 오늘의 시제로 주어진 글감을, 키워드가 아니라 주제로 녹여내기로 한 사람. 그런데 정작 내 하루가 먼저 소설처럼 나를 끌고 가고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목 안쪽에 서늘하게 걸렸다. 그리고 조용히, 마음속에서 다음 문장을 골랐다.
오늘의 시제는—
나는 골목으로 한 발 내딛었다. 내 발이 어둠에 들어가는 순간, 그림자가 길 위에서 미끄러지듯 따라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치 이 이야기가, 원래부터 내 것이었다는 듯이.
그리고 그때 알았다.
오늘은 내가 하루를 지나치는 날이 아니라, 하루가 나를 지나치는 날이라는 걸.
그림자는 그 증거였고, 나는 그 증거를 따라 문장을 쓰게 될 거라는 걸.
이렇게, 길에 늘어선 나의 그림자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오늘이라는 시제가 끝나기 전에, 나는 이 하루를 한 편의 이야기로 엮어야 한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지금’의 문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