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의 운동장은 이상한 마법이 걸린 것처럼 길게 늘어진 그림자들로 가득했다. 아이들은 자신보다 더 커진 그 검은 분신들을 밟고, 뛰고, 잡았다.
“내 그림자 머리 밟으면 죽는다!”
지수의 외침에 아이들이 소리 내 웃었다. 하지만 선율이는 조용히 자기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운동화 끝에 밟히는 검은 형체가 꼭 다른 누군가처럼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사람 같았다.
그날 이후로 선율은 매일 해질 무렵 놀이터로 나갔다. 아이들이 다 돌아간 뒤에도, 그늘이 남아 있는 모래밭 위에서 혼자 그림자를 가지고 놀았다. 그림자를 손으로 접듯이 구부려 보고, 몸을 비틀어 길이를 늘리고, 때로는 한 발로 서서 모양을 바꿨다. 어느 날은 바람이 유난히 세차게 불어, 그녀의 그림자가 기묘하게 흔들렸다. 그때였다.
“그렇게 놀면 아프지 않아?”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선율이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만 바닥의 그림자가, 분명 자기 그림자인데, 입술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다시 말했다.
“네가 자꾸 내 다리를 꼬면 좀 아파.”
선율은 얼어붙은 채 모래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도 이상한 호기심이 먼저 올라왔다.
“너… 내 그림자야?”
“너, 그리고 너 아닌 그림자.”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림자는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따로 움직였다. 선율이 고개를 기울이자, 그림자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로의 얼굴이 닮았지만 다르게 빛을 삼키는 거울 같았다.
“나는 네가 어둠 속에서 남기는 모양이야. 낮에는 내가 너를 따라가야 하지만, 밤엔 내가 너와 따로야.”
“그게 무슨 뜻이야?”
“곧 알게 돼.”
그날 이후, 선율은 그림자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학교 복도에서는 형광등 아래서조차 그림자가 숨을 쉬는 듯 들썩였다. 친구들과 장난치며 웃다가도,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그림자가 살짝 늦게 따라왔다. 그것은 미세했지만 분명한 차이였다.
밤이 오면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창가에 앉아 가로등 불빛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빛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도 살아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림자가 천천히 창문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빛이 꺼지지 않았는데도, 검은 형체의 눈이 열렸다.
“이제 나랑 놀자.”
목소리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림자는 창문 밖으로 걸어 나가며 손짓했다. 선율은 이상하게 거부할 수 없었다. 발끝이 스르르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가 끈으로 발을 당기듯. 그녀는 따라나섰다.
밖은 여전히 여름밤의 냄새로 가득했다. 풀 냄새, 먼지, 그리고 뜨거운 아스팔트의 잔열. 그림자는 앞장서서 길게 늘어졌고, 선율은 그 뒤를 밟았다. 놀이터까지 걸어가는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대신 그림자가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놀이터에 도착했을 때, 그림자가 말했다.
“이제 나를 밟아.”
선율은 당황했다.
“그럼 네가 없어지는 거 아니야?”
“밟지 않으면 내가 널 데려가야 할 수도 있어.”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이 놀이에는 규칙이 있는 듯했다. 그림자 놀이는 언제나 누가 밟히고, 누가 도망치는지로 결정된다. 선율은 조심스럽게 발을 들었다. 그림자가 살짝 피했다.
“좀 더 빨리.”
“너 왜 도망쳐?”
“넌 왜 쫓아와?”
서로의 숨이 섞였다. 바람이 멈추고, 놀이터의 미끄럼틀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두 존재는 빛의 경계를 따라 달렸다. 선율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그림자를 밟는 순간, 세상이 번쩍 뒤집히는 듯했다.
모든 소리가 멈췄다.
선율은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이터는 그대로였다. 다만 바닥에 있는 그림자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오지 않았다. 그것은 미세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 내 차례야.”
순간, 몸이 끌려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발 밑 이 푹 꺼지며 그림자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냄새도 없는 공간. 거꾸로 된 놀이터가 있었다. 거기서 또 다른 선율이 서 있었다. 눈빛이 달랐다.
“너는 이제 빛 쪽에 있을 차례야.”
말이 끝나자, 그림자 선율이 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몸이 땅 위로 올라가고, 진짜 선율은 아래로 떨어졌다. 위에서 그림자 선율이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는 빛을 닮아가고, 빛은 결국 그림자가 되지.”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
며칠 뒤, 놀이터에 놀러 온 아이들이 이상한 소문을 했다.
“여기 밤마다 그림자가 혼자 놀아.”
“진짜 사람처럼 움직이는데, 몸은 없어.”
누군가 핸드폰 불빛을 비추었다. 모래 위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혼자서 미끄럼틀을 오르고, 그네를 탔다. 빛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는 무언가를 찾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발 밑으로, 아주 희미한 또 하나의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그림자 놀이는 계속되었다.
해가 지는 한, 언제나 누군가의 차례가 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