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씨앗이었다.
바람에 실려 흘러다니다 어느 돌담 그늘에 툭 떨어졌다.
비에 젖은 흙이 나를 덮었고 땅속의 미지근한 압력이 등을 눌렀다.
껍질이 갈라지고 나는 세상을 향해 조심스럽게 밀어 올랐다.
차가운 공기가 처음 뺨을 스쳤던 순간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나는 느티나무가 되었다.
뿌리는 어둠 속에서 길을 냈고 빛은 위에서 나를 끌어당겼다.
눈은 없었지만 방향은 알았다.
물의 속도와 돌의 쉼표, 벌레의 경로를 따라 리는 조금씩 깊어졌다.
잎은 흔들리며 세상의 소리를 통과시켰고 가지는 바람을 담았다.
말은 없었지만 흔들림만으로나는 나의 감각을 알았다.
어느 해 아이 하나가 내 아래에 앉았다. 사탕을 굴리며 웃거나 울었다.
도망치듯 뛰어와 내 그늘에 숨었다. 나는 그를 품을 수 없었지만 잎을 살짝 흔들어 바람을 건넸다.
아이는 고개를 들고 웃었고 그 웃음은 오래 남았다.
나는 매해 잎을 피우고 떨어뜨렸다. 꽃을 피우고 씨를 날렸다.
비가 오면 물을 가지 끝까지 흘렸고 눈이 오면 무게를 견디다 가지 하나를 내려놓았다.
부러진 자리엔 더 단단한 나이테가 생겼다.상처는 깊었지만 기억은 조용히 겹을 이뤘다.
내 몸이 뽑혀 옮겨지던 날 뿌리가 울부짖으며 고통스러워 했다. 진동과 충격, 비스듬히 기운 하늘. 이유는 몰랐고 말할 수도 없었다. 다만 새로운 흙 아래에도 물은 있었다.
나는 다시 뿌리를 내렸고 다시 나의 시간을 살았다.
다시 그 아이가 왔다. 어른이 되어 아이 하나를 데리고.
작은 손이 내 줄기를 툭 치고 갔다. 나는 그 충격을 조용히 퍼뜨렸고 잎 하나가 아이의 이마를 간질였다. 아이는 웃었다. 그 웃음은 사라지지 않는 하루였다.
벌레가 껍질을 파고들고 균이 내 몸을 더듬었다. 사람들이 와서 붉은 약을 바르고 쇠막대를 세웠다. 고통은 말이 없고 기억은 색으로 남았다. 그 해의 나이테는 유난히 진했다.
시간은 그렇게 감정으로 남는다. 색, 결과 무늬로.
어느 봄 씨앗을 많이 맺었다. 바람은 그들을 데려갔고 하나는 가까운 흙에 닿았다.
며칠 뒤 작고 여린 초록이 땅을 뚫었다. 나는 물길 하나를 아주 작게 그리며 그쪽으로 뿌리를 움직였다. 말은 없고 압력만 있었다. 나는 전했다. ‘천천히 와도 괜찮다.’
지금 나는 가지 하나가 비어 있고 줄기엔 깊은 틈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잎을 피우고
바람을 건네며 뿌리를 더 깊이 묻는다. 내 시간은 나이테에만 새겨지지 않는다.
매일의 빛과 바람, 침묵 속에도 시간은 녹아 있다. 나는 단지 나의 시간을 살아왔다.
흔들리고 부러지고 다시 피어나며.
그것이 나무의 방식이고, 나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