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태어날 때 몸무게는 700g... 양수가 터지면서 심장이 멈춘 채로 태어났다. 하지만 심폐소생술을 멈추지 않았고 기적같이 다시 살아났다. 형태만 사람이지 몸의 기능은 모두 불안정해서 90퍼센트 이상의 확률로 치료받다가 죽을 거라고 했다. 운이 좋아서 살아나더라도 장애아가 될 거라고 담당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신생아 중환자실, 인큐베이터 안에서 지은이는 살아남으려고 모든 병과 사투를 벌였다. 심한 황달과 장폐색증으로 2번의 대수술도 견뎌야 했다. 지은이가 살아 숨 쉬는 하루하루가 기적이었다. 그렇게 4년을 보내고 마침내 모든 수치가 정상이 되었다.
어려운 생사의 갈림길에서 잘 살아준 것이 고맙고 기특한 마음이 크지만, 그 후유증인지 어릴 때부터 또래보다 이해력과 행동력이 느린 편이다. 옆에서 계속 챙겨줘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나는 항상 조급하고 걱정이 앞서곤 했다. 그런 마음에 지은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야 안심이 된다.
‘오늘 수강 신청했어? 과목을 어떻게 정했어? ’'과제는?''엄마한테 가지고 와봐'
‘교수님이나 조교한테 물어봤어??’ ‘왜 안 했어~ 이렇게 해야지~’
이젠 어엿한 대학생이 된 딸에게 나는 여전히 참견꾼이자 잔소리꾼이었다.
평상시와 같은 일상이었는데 갑자기 혼자 펑펑 울었던 그날, 알게 되었다. ' 아~ 딸이 다 컸구나! 이제 어른이구나!' 그럼 엄마인 나는? 나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지?' 딸이 성인이 되면 기쁘고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길을 잃고 헤매는 건 엄마인 나였다. 다 큰 딸을 아직 품고 있었던 듯 텅 빈 뱃속이 허전하기만 했다. 깊은 허탈감으로 실의에 빠졌다. 과연 엄마로서 나는 잘 해왔을까? 지은이가 원망하면 어쩌나... 엄마가 싫다고 훌훌 떠나가면 어쩌나... 아이들이 없으면 나는 누구일까? 수백 개의 질문과 걱정이 머릿속을 떠다녀서 일상생활이 힘들 지경이었다.
몇 달을 고민하다가 캘리그래피를 배우게 되었다. 종이 위에서 먹물을 머금은 붓이 천천히 움직일 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가만히 글씨를 쓰다 보면 폭풍 같던 마음이 고요해졌다. 종이에 스며드는 먹물을 보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들여다보지 못했던 온전한 나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살아오면서 그 역할에 파묻혀 있었다. 꺼내 보니 20대 풋풋하고 꿈 많던 아가씨가 40대 넉넉한 아줌마가 되어있었다. 체감하지 못한 사이에 20년이 흘렀다. 20년 동안 인생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모든 것이 부족하다 여겼지만 사실은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의 자세가 달라진다. 대학생이 된 딸이 떠나는 건 슬픈 일이 아니다. 엄마로서 딸을 잘 키웠고 성장한 딸을 보며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어떤 모습이던지, 어디에 있던지 변함없이 내가 사랑하는 딸이니까.
"엄마~ 오늘 좀 늦어, 친구들, 선배들과 저녁에 약속 있어~"
카톡에 남긴 딸의 말에 덜컥 마음이 내려앉고 거부감이 든다.
성인이 되어 내 손을 놓고 홀로 걷는 지은이의 모습이 여전히 낯설고 걱정이 된다.
어디서 어떤 사람들과 만날지, 무엇을 먹을지, 언제 집에 올지... 수십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참견하고 잔소리하고 싶다. 어쩌면 내가 지은이의 손을 더 꽉 잡고 있었던 것 같다.
머릿속에서는 딸의 손을 놓는 연습을 수시로 한다. 나와 딸의 행복을 위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