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달 동안의 기본 연습이 지겨워질 때쯤이라서 내심 반가웠다. 같이 배우던 동기 중에 나 포함 3명이 도전해 보기로 했다. 첫 만남부터 왠지 이야기가 잘 통하는 분들이었는데 어느새 서로 격려해 주면서 의기투합하는 사이가 되었다.
“시험에 쓸 문장를 일주일 동안 생각해 보시고 적어오세요”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어떤 말을 써야 하나 계속 고민했다. 여러 좋은 글귀들을 찾아보고 읽어보고 써보기도 했다. 그런데 찹쌀떡처럼 마음에 ‘척!’하고 달라붙는 글이 없어서 애가 탔다. 쓸데없이 욕심을 부려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내 인생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삶을 뒤돌아보며 정리하고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였나 자꾸 옛일이 생각났다.
“명진아, 이거 먹어봐”
전혀 먹음직스럽지 않게 생긴 꿀꿀이죽 같은 것을 그릇에 담아 내 앞에 둔다. 냄새도 고약하다. 넷째 고모가 냉장고와 반찬 서랍장을 다 뒤져서 여러 가지 음식을 끓여서 잡탕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자세히 보니 파리도 한 마리 들어있다.
“싫어! 고모나 먹어!”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모내기로 농사일이 바쁜 부모님은 정신병으로 매일 동네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고모를 감시하는 임무를 내게 맡기고 논으로 일하러 가셨다. 그날을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걸 보니 매우 무서웠나 보다. 어린 나에게는 이처럼 무서운 일이 아주 많이, 자주 있었다. 5명의 고모는 유전병인지 일 년에 한 번씩 꼭 순번을 정한 것처럼 정신병을 앓았다. 장손이었던 아빠와 엄마는 시댁 식구들 때문에 자주 싸우셨다.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님을 많이 원망했다. 특히 아빠가 미웠지만, 엄마를 더 많이 원망했다.
“엄마! 아빠와 이혼하고 나랑 명성이랑 나가서 살자~ 제발!”
엄마에게 화내기도 하고 울면서 매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는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면서도 끄떡하지 않았다.
“내가 너희 때문에 살아. 네가 3살, 네 동생이 1살 때 부부싸움 하다가 아빠한테 맞아서 엄마가 이혼하자고 했어. 아빠가 너희들을 안 주겠다는 거야. 그런데 내가 이러다 죽겠지 싶어서 젖이 나오는 가슴을 천으로 동여매고 가방 들고 혼자 집을 나섰어, 그런데 어린 너와 네 동생이 악을 쓰면서 엄마를 찾으며 우는 거야. 차마 발길이 안 떨어지더라고. 아빠한테서 너희들을 빼앗아 안으면서 말했어. 당신 같은 아빠 밑에서 커야 하는 내 자식들 불쌍해서 나 안 나간다고”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로 말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가 불쌍했지만 너무 바보 같아서 싫었다.
이런 내 생각이 180도 달라진 계기가 있었다. 7개월 미숙아로 태어난 내 딸을 인큐베이터에서 처음 본 날,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던 그날이었다. 살 수 있는 확률이 10프로, 살아도 장애아가 될 확률은 90프로 이상이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딸을 위해 신에게 울고 떼쓰고 기도하며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을 체감했다. 그때마다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도 어린 나를 안고 이렇게 울며 기도했겠지.
“명진아, 엄마가 네 딸 살려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걱정하지 마!”
하나님이 주신 생명, 포기하지 말고 살려야 한다. 엄마는 아빠를 설득해서 투사처럼 앞장서 주셨고 막대한 병원비를 지원하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다. 딸은 4년 동안의 투병 생활을 끝내고 기적처럼 완쾌되었다.
지금은 그렇게 속을 썩이던 고모들은 다 정신병을 고치시고 나름대로 자기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고 계신다. 엄마에게 항상 고맙다며 안부를 묻고 명절이나 생일 등 특별한 날에는 꼭 부모님을 찾아오신다. 아빠는 언제부턴가 새사람이 된 것처럼 엄마에게 너그러워지셨다. 엄마에게 잘 해주시고 엄마와 맛집 탐방을 같이 다니시는 걸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옛날에 혈기 왕성하신 모습이 오간데 없고 많이 웃으시고 엄마와 함께 하시는 모습이 정겹고 고맙다.
얼마 전 엄마는 활짝 웃으며 말씀하셨다.
“명진아, 엄마는 너무 행복해, 내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즐겁고 평화로워”
엄마의 사랑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항상 내 옆에 있었고 주는 것을 받기만 해서 소중한 줄 몰랐다. 그런데 아니었다. 엄마가 길고 긴 고통을 인내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이유,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마음이 채찍에 맞아 갈기 갈기 찢겨도 엄마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끌어안았다. 사랑으로 악을 쓰며 울던 아이들을 버리지 않았고, 죽어가던 어린 손녀딸을 꽉 붙잡아주었다. 과정이 너무 힘들었지만, 엄마의 희생과 사랑 덕분에 나또한힘든 삶의 고비를 잘 넘겼고 이제는 모든 것이 평화롭다.또한 어려움 속에서도 은혜의 이유를 찾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쳐주셨다. 엄마에게 평생 갚지 못할 큰 은혜를 입었다.
무심코 틀어놓은 CCM 노래 속에서 찹쌀떡처럼 마음에 ‘척!’ 달라붙는 가사가 들렸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 손경민 [은혜]
내 삶을 한 줄로 써야 한다면 이 문장을 쓰겠다.드디어 캘리그래피 시험에 쓸 문장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