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고민도 좋지만, 일단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인생이란 미로에서 길을 찾는 투박하지만 효과적인 방법

by 안치형

에피소드1. 텅 빈 학교


초등학교 때 일입니다. 학교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걸리는 곳으로 이사를 간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아버지가 명예퇴직을 하셨답니다. 러시아워에 발이 묶이지 않으려면 다른 친구들이 한창 단잠에 빠져 있을 때 집을 나서야 했습니다.


등교하면 보통 7시 30분. 친구들은 물론이고 선생님도 아무도 나오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텅 빈 학교에 혼자 있는 게 참 무서웠습니다. 온갖 학교 괴담이 다 떠올랐으니까요. 아이들이 올 때까지 운동장에서 기다린 적도 있는데, 시린 새벽공기는 생각보다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학교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삐그덕'


복도 끝에서 무슨 소리만 나도 털끝이 쭈뼛 섰습니다. 뭐라도 해야 했습니다. 학교에서 나는 소리를 희석하고자 교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전날 주번이 청소하고 간 교실을 한 번 더 쓸었습니다. 일부로 책상을 바닥에 끌어가면서 말이죠. 한참 소란을 피우다 보면 아이들이 한두 명씩 등교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창가에 턱을 괴고 있다가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면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습니다.



에피소드2. 낯선 정류장


수업을 마치고 친구네 집에 가방을 던져놓고 함께 놀이터로 나갔습니다. 공차기도 하고, 정글짐에서 얼음 땡도 하고. 땀 삐질삐질 흘리면서 정신없이 놀다 보면 어느덧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습니다. 다시 가방을 메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습니다.


만원 버스 안. 앞으로 한 시간을 가야 합니다. 운이 좋아서 금방 자리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두 손으로 꼭 안고 있으니 잠이 솔솔 쏟아졌습니다. 병든 닭처럼 사방으로 고개를 떨어트리고, 창문 틈에 머리카락이 끼어 뽑히기를 수차례. 그런데도 납덩어리가 눈꺼풀에 붙었는지, 좀처럼 눈을 뜨기 힘들었습니다.


"이번 정류장은..."


퍼뜩 정신을 차리니 낯선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돌아갈 차비도 없고. 일단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습니다.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생전 처음 보는 곳이었습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이후로 사람들에게 한 백번 정도는 물어보면서 집으로 걸어왔습니다. 몇 정거장이나 걸었을까. 발바닥에 불이 붙은 것 같았습니다. 가까스로 집에 도착해서 양말을 벗으니 발이 곰 발바닥처럼 퉁퉁 부어있었습니다.



에피소드3. 장난감 그리고 식당


아버지가 쉬시는 동안에는 어머니가 일하셨습니다. 하루는 장난감을 한 아름 가지고 오셔서 저를 주시는 줄 알았는데 앞으로 파실 거라 했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장난감을 팔기 위해 동네방네 돌아다니셨습니다. 가끔 백화점 지하 매대에서 물건을 팔기도 하셨습니다. 작은 체구와는 달리 어머니는 늘 활력이 넘쳤습니다. 불평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는 매일 도서관으로 출근을 하셨습니다. 20년간 일한 곳에서 하루아침에 나오셨으니 아무래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셨을 겁니다. 새로운 일도 구상하셔야 했을 테고요. 준비를 마치신 아버지는 퇴직금을 탈탈 털어 넣어 식당을 차리셨습니다. 서울 모처, 지하 1층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인테리어를 마치고 온 가족이 식당에서 이불을 깔고 누웠습니다.


“앞으로 잘살아 보자.”


한동안은 어찌나 힘드셨는지, 집에 들어오시면 씻고 나서 바로 침대에 곯아떨어지곤 하셨습니다. 벌써 25년 전 일입니다. 이제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 되셨습니다. 그 사이 저희 3남매는 모두 결혼을 했고, 아이들도 낳았습니다.






어느 날 매형이 말했습니다.


“네 누나는 참 신기한 사람이야. 무슨 일이 생기든 그러려니 하고 쓱쓱 해결해.”

“매형. 몰랐어요? 우리 집 사람들이 원래 그러잖아요. ‘어쩌겠어, 해야지’ 마인드."

“그래?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고민하거나 속상하거나 그런 건 없어?”

“글쎄요. 그럴 시간에 방법을 찾는 게 빠를 것 같은데요?”


텅 빈 학교가 무서우면 소란을 피웠고, 빈손으로 낯선 곳에 던져지면 사람들에게 방향을 물어보고 걸어오면 그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실직하면 어머니가 일하면 되고, 준비되면 어머니와 힘을 합쳐 새 일을 시작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 내 인생에 왜 이런 일이 생겼나 고민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갈 테니까요.


고민도 중요하지만, 일단 삶을 지속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이해가 부족할 수 있다는 염려도 있을 법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DNA에 박혔든, 습관이 들었든 말이죠.


가끔 생각합니다. 인생은 미로에서 길을 찾는 것 같다고. 이 문을 열어야 할 것 같은데 알고 보니 저 문이고, 저 문이라 확신했는데 전혀 다른 문 뒤에 길이 있는 그런 미로 말이죠.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처음 맞닥뜨린 상황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럴 때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 눈앞에 있는 문부터 하나씩 열어보는 것도 꽤 훌륭한 방법입니다. 투박해 보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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