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할아버지 목욕을 시키자고요? 투, 투게더? 넌 그냥 샤워기만 들고 있으면 돼. 아니 그, 그래도...
고상한 영국 할머니로 함께 산책을 다녀온 Catherine 이 갑자기 억센 아줌마로 빙의하더니 할아버지의 외출복을 벗기기 시작한다. 어,어디까지 벗기실 건가요? 제,제가 아직 한 번도 못봤(?)걸랑요.
남자게스트에겐 남자봉사자를 붙여주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성비가 항상 맞을 수는 없다. 다행히 Jim 할아버지에겐 Catherine 할머니가 계셔서 나는 보조만 맞추면 되었다.
우리는 낮에 산책을 다녀왔다.
네틀리 센터는 주변 환경이 근사했다. 바로 앞은 자갈과 바닷가, 옆은 숲으로 둘러싸인 공원이었다. 숲에 들어서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심해로 가라앉던 내면이 푸우 숨을 쉬러 수면 위로 올라온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언제부터 이렇게 돌보셨나요? 혼자서 힘드실 때도 많았겠어요" 건네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주제넘은 거 같기도 하고 영어가 안 돼서 아니고 말없이 나란히 숲길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사실 재잘재잘 떠들 마음의 상태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혹시라도 말벗을 원하셨다면 영어가 유창하지 않고 붙임성 없는 봉사자를 만나게 해 드려 죄송하다. 그래도.. 내 느낌에, 할머니도 싫지 않으셨던 거 같다(정신승리). 회색빛 4월의 영국이 잠시 모자를 벗고 인사한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비춰 들어오는 햇살. 잉글랜드 섬 남쪽 끝 바닷가, 나는 지금 이곳에 서 있다.
산책을 다녀온 할머니는 할아버지 목욕을 할 거라고 하셨다.
그럼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 조용히 방을 나가려는데 어디 가냐며, 넌 샤워기를 들고 있어야 한단다. 샤,샤워기를... 그렇죠 걸어두고 할 수는 없고, 남자 매니저님을 불러드릴게요. 매니저님이 필요하긴 했다. 할아버지를 들어 옮겨 옷을 벗겨야 됐고 휠체어에 다시 앉혀 드려야 했고.. 그,그리고 가시면 어떡하죠 매니저님?! 가지 마세요!! 할아버지 샤,샤워.....
내 몫이었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휠체어에 앉아 계셨고 난 그곳(?)이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를 찾아 슬금슬금 샤워기를 들고 이동하며 물을 뿌렸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느라 할머니 몸에 물을 뿌린 거 같기도 하다. 실눈으로 요리조리 보느라 할아버지가 속옷을 입고 계셨는지 아닌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내가 뭔가를 보지 못한 것은 분명한 거 같다. 지금 생각하면 할아버지의 인권을 위해 내가 있었으면 안 되지 않나 싶기도. 할머니가 허락하셨으니 된 건가.
드디어 목욕이 끝나고 도망치듯 나왔다. 헉헉 힘든 일 한 것도 없는데 너무 진이 빠진다. 아, 남자 게스트는 다신 못 맡는다고 해야지.
그걸 영어로 어떻게 설명한다....?
우아하고 헌신적이었던 Catherine 할머니, 공원산책 중에도 a cup of tea는 필수
할머니가 선물해 준 수첩의 엽서표지. 네틀리가 영국 무슨 전쟁 때 이 배가 정박해 있던 곳이라고 한다.
마지막 날 할머니는 내게 작은 엽서표지의 수첩을 선물로 주셨다. 맨 앞장에 빼곡히 편지도 써주셨다. 그 메모장만 뜯어 따로 간직했는데 (왜 그랬을까) 분명히 있었는데 없다. 내가 할머니께 드리려다 망쳐서 못 드린 편지는 나한테 있는데. 그때 영국에 같이 있었던 친정언니에게 하소연을 하니
"저번에 엄마가 우리꺼라고 처리하라고 큰 짐을 하나 보냈는데, 우리 영국 갔을 때 종이들 지저분하게 쌓여있어서 쓸데없는 건 다 버렸어. 그래도 사진은 내가 갖고 있다야. 잘했지? ㅎㅎㅎㅎㅎㅎ" 안 웃기다. 거기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한테 묻지도 않고 다 버렸다고? 그렇구나 비움의 실천을 잘하는 언니구나. 사진제공은 감사하다만...
언니를 괴롭힐 방법을 찾고 있다. 카톡을 귀찮아하는 언니에게 매일같이 카톡폭탄을 날려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