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 [프랑스어] roman
[명사] 실현하고 싶은 소망이나 이상
로망이란 말 자체로 사랑스럽다. 불어인지 몰랐는데, 어쩐지 낭만스럽더라. 나에게 로망은 낭만과 혼동되는 말이다.
며칠 전까지 비가 와서 수량도 적당한 인적 드문 계곡에 발을 담그고
고소한 산미의 진한 아이스라떼로 간간이 목을 적신다.
무릎까지 걷어올린 바지가 행여 젖을까 조심하며 아이들이 물속을 빤히 응시한다.
돌멩인지 개구린지 모를 울퉁불퉁한 것이 튀어 오르는 순간 날렵한 큰 애의 손이 그것을 덮친다.
열세 살, 아홉 살 두 아들들의 환호성에 기분 좋은 미소를 날려주고,
어제 읽다 만 책갈피가 꽂혀있는 페이지를 펼친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224p.
이사벨라 린튼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출해서 히스클리프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의 환영이 사라지기도 전에 그녀는 폭풍의 언덕이라 이름하는 히스클리프의 집으로 들어왔고 금세 마음의 위안이 필요해졌다. "주위에 아무런 위안도 없다는 것을 넋두리하는 것은 다만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야." 집 이름에서 풍기는 뉘앙스만큼이나 이사벨라의 머릿속은 혼돈스럽다. 가출까지 감행해서 이룬 결혼이건만, 로망 하던 결혼생활과 남편이 아니다. 로망은커녕 "히스클리프가 인간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진다.
낭만을 바라고 결혼 한 이사벨라 린튼에게 폭풍의 언덕에서의 현실은...
나는 책에서 눈을 뗐다.
현실에 인적 드문 계곡 따위는 없다.
한 그릇에 2만 원이나 하면서 맛도 없는 파스타를 파는 카페지만
계곡로망을 실현키 위해 수영복으로 무장한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바글바글,
돛데기시장이 따로 없다.
고소한 산미인지 머인지 알려해도 알 수 없는 것이
커피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커다란 나무 밑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남자 손바닥보다 커다란,
진정 새 크기 만한 검은 나비가 펄럭펄럭 머리 위에서 왔다 갔다 한다.
처음엔 왕벌인 줄 알고 기겁했던 벌새(?)도 주책을 떨며 가만있질 않는다.
나무가 테이블을 반만 가려줘서 태양 쪽에 앉은 내 정수리는 점점 달궈지고
아들 둘은 여벌 옷도 없는데 바지를 조심하긴커녕 첨벙첨벙 다 젖었다.
자기가 꽂힌 음식은 무조건, 당장 먹어야 하는 둘째가 보리밥집을 가고 싶어 했는데 이 카페로 데려왔다.
보리밥집을 먼저 가면 이 계곡 앞 카페자리를 맡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를 겨우 설득시킨 2만 원짜리 크림 파스타에 남편이 커피를 쏟았다.
혼자서 피자와 파스타, 커피까지 양손에 각각 쟁반째 들고 오느라 손이 휘청휘청했던 것이다.
커피컵이 파스타에 엎어지며 커피파스타가 완성됐다. 보리밥 먹고 싶다고 울던 둘째의 2차 울음이 시작됐다.
다른 때는 그렇게도 커피 먹어보고 싶다더니 정작 대령한 커피파스타엔 나라를 잃은 듯 울기 시작했다.
계곡에서 커피 마시며 책 보는 로망을 품고 온 카페에서
누가 듣든말든 폭발한 두 ADHD 모자의 교양 없는 유치뽕 싸움이 시작됐다.
이 모든 상황이 창피한 큰 아이는 계곡 물로 도망가고
남편은 얼굴을 숙이고 의자를 멀찍이 떨어뜨려 앉는다.
울음 좀 그치라는 나의 등짝 스매싱이 날아가고 아이의 사이렌이 더 크게 울렸다.
결국 남편은 아들을 들고 아니 데리고 보리밥집으로 황급히 달아났다.
이렇게 보리밥집에서 식사를 하고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 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
아이가 보리밥집을 간 사이 찰나의 로망을 누린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