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37-50
이렇게 많은 표적을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7절)
내게 하시는 말씀 같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행하신 기적이 이렇게 많은데 아직도 나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기보다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고백한다. 아이들에게 부모가 삶으로 가르친 것만 남는다고 하는데 중1 된 아들이 큐티를 전혀 하지 않고 주일에 큐티책을 들고 가지도 않는다(그걸로 나눔을 하는데). 내 신앙고백이 미약하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너무 사랑하는 걸 아들이 다 안다고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서늘하다. 그러나 이 또한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38절)고 하신다. 목사님의 설교말씀이 어그리되지 않아 화가 나는 남편과 큐티를 안 한 지 오래된, 방학 내내 게임만 하며 점점 거칠어지는 큰아들. 이들을 통해 내가 무엇을 더 사랑하고 열망하는지, 삶으로 무엇을 보여줬는지 생각하라고 하신다.
남편과 나는 평생 욕을 해본 적이 없다.
물론 남 흉보기 같은 거야 했지만 멍멍이나 식빵, eighteen과 같은 적나라한 단어로 욕을 한 적은 없다. 남편과 친한 한 교회오빠는 자기가 평생 욕 하는 걸 한 번도 못 본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내 남편이라고 했었다. 나도 혼자 있을 때도 욕을 안 했는데 내 전공과목은 욕이 아니라 '원망과 탓'이었다. 서로를 향한 원망과 비난, 무시의 말은 하면서 대놓고 쌍욕을 한 적은 없기에 남편과 나는 '100% 죄인'이 되지 못했다. 우린 각자 '난 좀 괜찮은 죄인'이었다. 세리를 향해 바리새인이 기도한 것처럼 내가 저 사람만큼 죄인은 아니라서 감사하다는 게 우리의 고백이었다.
주일 예배 후 핸드폰으로 게임하고 있는 아들에게 "이제 집에 가자"라고 했다.
"이따가"
"이따가 언제?"
"이따가가 이따가지 뭐가 언제야" (눈은 핸드폰에 고정)
삐딱했다. (뭔가 더 기분 나쁘게 대꾸했는데 까먹었다)
큰 아이는 짜증을 낼 때 내가 예상하는 일반적인(?) 짜증이 아니라서 너무 급작스럽고 당황스럽다.
가만히 얌전하게 화났는지 모르게 있다가, 잠잠하던 바다에 갑자기 해일이 치듯 화악 크고 거친 행동으로 표현한다. 차 안에서 조용히 핸드폰을 하다가 갑자기 두 발을 쾅 굴러서 엉덩이가 붕 뜨고 허리를 뒤로 젖히며 발작난 듯 뛰어올라서 깜짝 놀라게 하는 식이다. "왜 그래?" 했더니 "(게임이) 짜증 나서". 당최 예상이 안된다.
더 이상 설왕설래 안 하고 내려왔다. 남편이 전화를 거는데 받지 않는다.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으니 받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인데 두 번은 끊더니 세 번째는 받지 않는다. 아빠가 올라가서 데리고 왔다. 아이는 식빵식빵 거리며 내려왔고 차를 기다리는 중에도 핸드폰게임만 하며 개@#라고 내뱉었다.
아이가 화나거나 억울할 때 무조건 정답만 들이밀며 교육하는 것보다 같이 욕도 해주고 그래야 아이도 엄마가 편해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게 되고 그런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요즘 아이들의 언어려니 하면서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지 않나. 애아빠가 너 게임하면서 자꾸 욕한다고 했더니 아빠한테 욕한 것도 아닌데 뭔 상관이냐 한다. 그 욕이 앞으로 부모를 향하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하겠나. 그리고 지금 그 말을 하는 네 태도는..
아들 둘 엄마로서 애들 등짝을 후드려 패기도 했고 둘째는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기를 몇 번이나 했었다. 거친 쌍욕은 입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더라. 그러면서 욕 안 하는 내가 욕 하는 사람보다 더 교양 있고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편견과 오만을 회개한다. 겉으로만 안 했지 속으로는 얼마나 추악하게 미워하고 살인하며 원망했던가. 그래서 사실 좀 편한 사람이 되고자 혼자서라도 아님 글에서라도 욕을 하려고 노력도 했었다(?). 욕할 줄 알아야 편한 사람이라는 건 아니다만 너무 내가 거룩한 줄 아는 것 같아서 한 행동이었다. 욕도 자꾸 해야 입에 붙더라. 그러고 보니 애도 이제 중학생이 되어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한 연습을 하는 건가. 결론이 이상하다.
내가 괜찮은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나는 주님이 필요한 100퍼센트 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