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uce도 아니고 saucer는 머야

영국 자원봉사센터에서

by 그리다 살랑
KakaoTalk_20230225_194927918.jpg 킨포크 테이블의 표지를 그리다


자꾸 뭔 소스를 달라고 하는 거지.




1주일간 센터에 휴양차 묵으러 온 '블라'양은 (당연히 이름은 까먹었다) 내 또래였던 거 같고 오랜 휠체어 생활로 몸은 육중했다. 그녀를 밀며 런던의 한복판을 다니는 것은 왜소(?) 스물둘 아가씨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성당으로 소풍을 나간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템즈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와 간식 등을 꺼내며 분주히 움직였다. 영어를 못하면 센스라도 어야 는데 블라양이 뭔가를 계속 달라고 하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는 거다. 휴지? 포크? 아닌데.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게 대체 뭘까.


정말 울고 싶었다. 쏘리/ 파든 미/ 쿠쥬 세이 원모어 등 아는 영어 다 동원해(3개가 전부) 한 번만 더 말해주길 애원했는데, 보통 그 정도 되면 속으론 욕 할지언정 손짓발짓으로 뭘 원하는지 시늉이라도 해줄 텐데 이 분은 화가 난 얼굴로 계속해서 블라블라 끝도 없는 영어를 퍼붓는 것이었다. 아 제발 누가 좀 도와주세요 차라리 엉엉 울기라도 했으면 누가 와줬을 것 같은데(아닌가) 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울거나 소리 지르지 않고 그대로 얼어버리는지. 그러니 상대방은 더 답답할 것이다. 샌드위치를 먹는데 그녀에게 필요한 게 대체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머리가 하얗게 된 나는 정말 거짓말 안보태고 30분? 40분? 넘게 그녀의 욕지거리(못 알아들었지만)를 우두커니 들을 수밖에 없었다.


개인별 관광시간이 끝나고 센터로 돌아가 매니저에게 그날의 참상을 보고하게 됐다. 매니저는 솔직히 말하면 내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블라양이 내가 맘에 들지 않는 거 같다고 했다. 센스 있게 잘 돌봐주지도 못하면서 영어도 잘 못 알아들으니 블라양의 불만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도대체 그녀가 원한 것은 무엇이었냐고, 그때까지도 못 알아들은 수치를 무릅쓰고 매니저에게 물어봤다.


saucer



부끄럽지만 처음 들었다. 소스도 아니고 소시지도 아니고 소서가 뭐냐고요.......

방에 들어와 사전을 찾아본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saucer : 받침. 접시 모양의 물건.

컵받침 달라고 한 거야? 티타임도 아닌데 컵받침이 웬 말이야, 아 앞접시 달라고 한 건가? 손으로 받쳐 먹는 시늉이라도 해 주지, 눈치라도 채게... 눈치 못 챘으려나. 사실 할 말은 없다. 그날 이후 나는 saucer를 잊지 않는다. 영국인들에겐 saucer가 필요하다. 블라양 같은 영국인에겐.





매니저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꽤 오랜 시간 영어로 설명하고 나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호 이것 봐라 나 영어 쫌 하는데? 영어로 설명이 돼. 매니저 말도 거의 알아듣겠어' 봉사고 머고 의욕이 다 꺾인 채 아직도 놀란 가슴은 진정이 안되는데, saucer는 이제 확실히 알았다.



2004년 영국 자원봉사센터 그날의 블라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