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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 Jan 24. 2024

가사도우미 처방이 내려졌습니다.

내게 힘든 건 살림

아이들이 방학을 시작하고 고작 2주 남짓 지났을 뿐인데 대노한 난 신경 정신과를 방문했다.

밑도 끝도 없이 불안할 때, 이유 있는 불안이 찾아올 때 신경정신과의 도움을 받곤 하는 이 연약한 인간이 바로 나다.


"요즘 화나는 일이 많나요?"

"네 어제 아주 화가 많이 났습니다. 퇴근했는데 집이 엉망이어서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티브이로 접하다 내 집에서 그 전쟁터를 보게 될 줄 몰랐던 것은 결코 아니다. 나름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그날은 낮에 아들의 친구들이 왔단다.

가위, 바위, 보로 설거지 내기를 한 후 설거지를 하던 아들의 친구가 개수대에 거름망이 끼워져 있지 않은 걸 모르고 음식물을 붓다 배수관이 막혔다. 그래도 설거지를 한다는 자체가 좋은 의도였으니 어른인 내가 너그러이 넘어가야지..

하지만 거실, 주방 곳곳에 제대로 자리하고 있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었던 집안꼴은 폭격을 맞은 것 같았다.

아들의 해명과 아들 친구의 사과 전화로 마음이 조금 풀어지긴 했지만 버거움의 한계점이 파도치듯 넘나들고 있던 터라 쉽사리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집안일이 엄마인 그리고 아내인 내게만 집중되어 있는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요즘 특히나 버겁기만 하던 차였다.  우라질 방학 때문인가?


기안 84가 우리 집에 셋 있다.

참고로 난 기안 84를 좋아하고 그의 삶을 공감하기도 하지만 그 뒤처리가 모두 내 일이 되는 우리 집에서는 문제가 다르다.


본인들이 벗어 놓은 옷을 그냥 밟고 지나다녀도

식탁에 먹다 흘린 물이 말라 있어도 숟가락을 놓고 다음끼를 먹을 수 있는 기특한 이들이 바로 우리 집 남자들이다.


버거움이 한계에 다다르니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그날 화를 덮고 있던 내 안의 뚜껑이 날아갔다.


주방의 일부


"가사 도우미 안 쓰세요?"

"안 써요"

"이유는요?"

"돈이 없어서요"

"일하시잖아요?"

"일해도 돈이 없어요."

"육아, 살림, 일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요. 살림에 대한 공감이 없는 가족들을 바꾸려면 더 부딪히게 되니 가사도우미를 쓰세요."


가사도우미? 그 돈 많은 사모님이나 고용한다는 가사도우미를 쓰라고?

얼마 번다고 가사도우미까지?

내 주변 워킹맘 중에 가사도우미를 쓰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다들 일하고 애 키우고 살림하고 잘만 하고 살던데

이 모든 것을 해내기에 한없이 역량이 부족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난 왜 이모양인지 자존감이 낮아지기 시작하던 찰나 살림에 대한 공감이라는 말에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다시 눌러보려 애를 먹었다.


가사라는 끝없는 집안일의 분담을 놓고 팽팽해지는 건 비단 우리 가정의 문제 만은 아닐 것이다.

옛날에는 다 여자들이 하고 살던 그 일들이 왜 나한테는 힘들어 징징거리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건지 모르겠으나 일단 아들들을 잘 가르쳐 보고자 한다. 도움은 안 돼도 폐는 끼치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환자는 의사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래서 난 가사도우미 고용을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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