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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 Mar 29. 2024

과일은 셀프

과일은 좀 셀프

남편 이야기를 좀 해 보고 싶다.

남편은 70년대 생이지만

구한말 김첨지의 인력거가 택시를 대신했던 시대의 지아비 모습을 닮은 사람이다.


남편은 성실한 회사 생활과 간간히 뛰는 투잡으로 월급을 따박따박 가져다주는 모범적인 가장이다.

하지만 바깥일과 본인의 취미에 관련된 것을 제외하곤 모르는 게 많아도 너무 많은 사람이다.


여자들은 임신 시 아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십리 밖에서라도 구해 오는 남편의 모습을 보통 상상하지 않는가?

내 남편은 그런 환상 속 남편과 십리 밖이라는 거리만큼 먼 사람이었다.


임신 시 햄버거가 먹고 싶다는 내 말에 빈손으로 퇴근한 남편

나는 남편에게 햄버거를 사 왔냐고  대뜸 물었다.

그러자 화를 내며 네가 먹고 싶다고 했지 사 오라고는 안 했잖아라고 답한 사람이 바로 내 남편이다.

기가 차고 코가 차고 순사가 칼을 찰 법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 대는 건 남편의 특기이다.




정말 몰라서 저런 소리를 해대는 건 건 절대 아니다.

남편은 본인을 향하는 작은 자극에도 날 선 방어기제를 가동해 상대를 미리 제압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나처럼 목소리만 커지면 흠칫 놀라 꼬리를 내리는 상대는 소위 말해 쉽다 못해도 밥인 것이다.



첫 아이 출산 후 완전 모유 수유에 실패하고 혼합 수유를 하던 때였다. 

젖병을 삶아달란 내 요청에 남편은 라면 끓이던 젓가락을 끓는 물속에 넣고 젖병을 뒤집었다. 남편은 이렇듯 삼척동자도 안 할 행동을 해대는 세상에 둘도 없는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였다.


놀래서 잔소리를  한마디 했는데 바로 버럭 화를 내며 네가 가르쳐 줬나라고 응수했다.

또 기가 차고 코가 차고 순사가 칼을 찰법한 소리를 시전 했다. 


그렇다. 이 남자는 자신은 문인으로 못하는 게 많다고 직접 말하며 하기 싫은 일에는 수시로 발을 빼는 얄미운 인간이었던 것이다. 버럭버럭 화내는 모습 역시 1930년 대 생인 돌아가신 우리 외할아버지 같으니

더는 말해 뭐 하겠는가...



케케묵다 못해 기억도 못할 이야기를 꺼내는 내가 치졸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남편이 저지른 총천연색 만행들은 아마 평생 내 머릿속에서 회자될 수도 있다.



결혼 후 화장실 청소를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행복한 남편에게 내가 지어준 별명은 아기이다.

우리 집 덩치 큰 아기는 침대를 사랑하고 틈만 나면 누워서 가만히 티브이를 시청하는 취미를 가졌다.


세월이 흘러 아기 대하듯 어르고 달래서 이제 겨우 설거지 정도는 한다. 다 씻은  그릇을 싱크대 주변 사방팔방에 엎어 놓긴 하지만 이럴 때 용돈도 쥐어주고 잘했다 칭찬해 줘야 다음에 또 해 준다.


빨래를 갤 줄 모른다던 남편은

얼마 전부터 간간히 빨래도 개주곤 하는데 각까지 잡아 그렇게 잘 갤 수가 없더라.

인간은 집안일이 하기 싫어 오랜 세월 나한테 구라를 친 것이었다.



남녀평등 교육은 여자, 남자가 함께 받는데 성역할이 관습화 되어 있어서 인지 항상 맞벌이를 하면서도 가사는 내게 집중되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각자의 일에 대한 스트레스 정도를 따지자면 남편 쪽이 월등히 높긴 하지만 집안일에 대한 스트레스는 내가 훨씬 높다. 퇴근 후 다시 출근 인 삶을 벌써 여러 해 살고 있다.


남편은 나와 다르게 사상체질에서 말하는 태양인의 특징을 지닌 사람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잔병치레도 별로 없는 건강한 듯 보이는 사람이다.

내가 워낙에 잔병치레가 많아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 매일 반주를 즐기거나 음주를 즐기고 늦게 귀가를 한다. 본인은 주(酒)를 싫어하는데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신다는 게 남편의 변(辯)이다.


적당히 늦은 밤 남편이 귀가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첫 발을 내딛는 남편의 발소리 만으로도 그날의 음주량이 반주였는지 음주였는지 가늠이 간다.


남편은 잠들기 전 글쓰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내게

오렌지를 까달라는 아무 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요구를 했다.

남편은 집요하고 심술궂은 아이 같은 구석이 있다. 만약 오렌지를 까 주지 않는다면 까줄 때까지 까 달라고 떼를 부리다 결국 화를 낼 것이 뻔하다.

남편은 사소한 데 자존심을 세우며 자기 말을 안 들어주면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지 화를 낸다.


난 결국 이불속에서 나와 오렌지를 까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쉽게 해 주기는 싫다. 나도 심술이 다.

한 번은 못 들은 척 가만히 있다가 두 번째 요구가 이어지면 그제야 몸을 움직여 과도를 잡는다.


남자는 여자를 정말로 귀찮게 하네

노래 가사의 여자 주인공 실제 모델이 내가 아닌가 착각이 든다.


깎은 오렌지를 무심하게 건네며  

과일은 셀프 

라고 말하고 다시 누웠다.

과일은 좀 셀프~~


오렌지를 냠냠 먹은 후 남편은 조용해졌다.

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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