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사를 대하는 소심한 며느리의 태도
소심한 며느리는 제사에 필참 한다.
친정아버지는 8남매 중 둘째이고 위로 나의 큰아버지가 계시다.
서울 사시는 큰아버지께서 자주 내려올 수가 없으니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둘째 며느리인 우리 엄마의 몫이 되었다.
명절과 제사 덤으로 농사일까지 엄마는 그렇게 할아버지 집을 제 집 드나들 듯 드나들며 본인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 며느리로서의 도리 이상의 역할들을 해 내었다.
엄마 말을 들어보면 그때는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고 본인 가족을 끔찍이 아끼던 아빠 역시 엄마의 희생을 암묵적으로 당연한 듯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어릴 적 나와 동생을 변변한 학원 한번 다녀 본 적이 없었고 난 남들 다 가는 유치원도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엄마와 함께 다녀오던 시골버스 종점에서 멀미 때문에 토 한 기억은 있다.
엄마가 준비해서 지내는 제사나 명절 차례는 맛있는 거 먹고 친척들 만나고 오는 즐거운 날 중에 하나였다.
엄마 역시 본인이 워낙에 고생을 하셔서 인지 내게 어떤 도움도 청하시는 일이 없었고 하물며 설거지 조차 시키지 않으셨다.
내가 장손에 장남과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엄마는 너무나 걱정하셨다. 곱게 키운 딸이 집안 대소사로 스트레스받고 고생할까 그러신 것이다.
결혼 후 며느리가 되어 느끼는 제사와 명절의 압박감은 실로 상상을 초월했다.
그 압박감에는 당연히 며느리에 대한 시댁 식구들의 기대치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기에 더 부담으로 다가왔다.
난 소위 X 세대라고 불리며 밀레니엄쯤 대학교를 다닌 세대이고 우리 부모님 세대만큼 제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대가 많이 변해 지금은 내 친정 부모님 역시 제사가 그 의미도 형식도 보존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시긴 하더라.
결혼 후 첫제사 때 일이다.
남편은 회사 일로 제사에 불참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당연한 듯 나 혼자 오라고 명하셨다.
나도 신랑도 예상치 못 한 일이었다. 결혼 후 한 달 만에 맞게 된 제사에 난 혼자 갈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어린 며느리였던 나는 눈물부터 쏟아냈다. 남편 역시 나 혼자 보내는 게 미안하고 탐탁지 않았지만 어머니께 대적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는지 시외버스에 나를 홀로 태워 그 무섭다는 시댁행 티켓을 쥐어주었다.
그때부터 제사나 명절에 내가 못 가게 될 까봐 날짜가 다가오면 불안 해 지기 시작했다. 마음은 안 가고 싶지만 오지 말라 하실 분도 아니고 가령 못 가는 날에는 대역 죄인처럼 죄송하다를 반복하며 못 가는 이유에 대해 주저리주러리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더 싫었다.
첫 아이 낳고 65일째 되던 날 갓난쟁이 데리고 시골 시댁으로 제사를 다녀왔다. 첫 아이라 두 시간 이상 걸리는 시댁까지 가는 것도 초보 엄마였던 내게 모험이었고 겨울이라 아이가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되었지만 차마 못 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 아이를 따뜻한 토끼 올인원을 입혀 제사를 지내러 가게 되었다. 다행히 아이는 감기에 걸리지도 피곤해하며 투정을 부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이까지 신경 쓰며 제사에 다녀오니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느낌이 들어 이게 바로 유체이탈이구나 싶었다.
둘째 낳고는 며칠 후가 추석이었다. 시부모님들이 출산 한 며느리를 명절에 오라 마라 논 할 정도의 최악의 인품을 아니었지만 소심한 며느리였던 나는 명절에 가서 일을 거들지 못하는 것에 대한 걱정에 어머니께 거듭 사과를 드렸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때 어머니는 ‘네가 어찌 오니’ 하셨고 산후조리 잘하라고 당부하셨다.
출산 한 며느리가 명절을 쐬러 못 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당시 제사와 명절에 대한 압박감은 몸을 푼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내게 어머니께 드려야 할 말들을 고민하게 할 만큼 심각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내 나이 32 살에 나를 짓누르는 압박감의 산물인 제사가 내 손에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