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慶事) 보다 조사(弔事)가 많은 시기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나이

by 송주

늘 그렇듯 경조사비는 여전히 지출의 일부분을 자치한다.

젊은 시절에는 결혼식과 돌잔치에 초대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웨딩드레스 입은 신부의 화려한 모습에 집중하던 시절이 지나면 정해진 수순처럼 돌잔치 초대장을 받곤 했다.


40대 중반

결혼식과 돌잔치에 초대받아 본 게 언제 인지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작년부터 장례식장을 다녀온 횟수는 부지기수다.

늙고 병든 육신이 자연으로 돌아갔음을 알리는 부고도 있었고 예고 없이 접해야 하는 부고나 예상은 했지만 받고 싶지 않은 부고도 있었다.


작년 가을

직장 앞에 차를 대고 내리는 순간 여느 때와 다른 이상한 동네 분위기가 느껴졌다.

방송국 스티커를 붙인 차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과 기자로 보이는 이들의 분주한 움직임에 직감적으로

설마를 되뇌었던 순간이었다.

그 설마는 사람을 잡듯 촉이 좋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또래 아들들을 키우고 있었던, 한때 우리 아들의 공부방 선생님였던 그녀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곁에는 그녀의 착한 아들들도 함께였다.

경찰 수사에서 생활고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라 전해 진 그녀의 소식은 지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잊히지 않는 사건이 되었다.

그녀의 지난 인생을 다 알 수는 없었다. 나와는 아이의 공부방 선생님으로 앞면을 트고 지내다 내가 그 동네에서 이사를 나온 후 여러 사유로 조금 더 가까워진 사이였다.

내 휴대폰 속에 남은 그녀의 큰아들이 내 반려견 크림이를 안고 있는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린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는 고통이 죽음의 공포보다 더 무거웠을 그녀는 선택의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끔 외할머니가 계신 지역 공설 납골당에 갈 때면 일층 있는 그녀와 아이들을 보고 온다. 그들이 바로 일층 아주 찾기 좋은 장소에 있는 걸 알기에 그냥 지나쳐 오기는 힘들다.

가장 아래쪽에 나란히 놓인 세 구의 유골함을 볼 때면 슬픔을 넘어 기가 막힌다는 표현에 더 어울릴 만한 감정이 올라오곤 한다.

그들의 유골함 앞에서는 함께 있어 더 낫겠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아 동생이랑 엄마랑 잘 있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인사일 뿐이었다.


올초 지인의 남편이 병으로 짧은 생을 마치고 자연으로 돌아갔다.

장례식 장에서 나를 맞은 지친 얼굴의 지인은

"처음 남편이 암 진단받을 때만 해도 이런 결론이 날 거란 생각은 아예 못 했어요."

수술도 필요 없을 만큼 초기였던 암은 6개월 사이 커져 전이까지 된 상태였다고 한다.

힘들었을 남편의 마지막만큼이나 지인도 지쳐 보여 더 마음이 아팠다.


얼마 전 외할머니의 죽음으로 소위 말해 엄마의 윗 세대들이 모두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밀도 있게 채워져 있던 외할머니의 집은 그대로였지만 그 안에 단 한 사람 외할머니만 증발하듯 없어져 버렸다. 삼 년 전 먼저 가신 외할아버지 역시 사진 속에서 박제된 듯 자리하고 계셨다.

외할머니의 죽음은 호상이라 칭해졌지만 호상은 유족을 위로하기 위한 주변인들이 지어 낸 말이라 생각한다.

죽음은 그냥 죽음일 뿐이다.

굽은 육신만큼 고단했던 외할머니의 삶이 무(無)로 돌아가는 순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40 중반의 외손녀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다시 고찰하게 되었다.


얼마 전 지인 아버지의 부고에 '아 ~ ㅇㅇ할아버지 편찮으시다더니..'

예상 했던 부고에 이렇게 담담한 척 위로의 인사를 건네다 결국 말 끝을 흐리게 되는 것이 죽음이다.


부고를 접하고 장례식장으로 간다

그곳에 머무는 시간만큼은 허탈함과 무상함을 통렬히 깨닫고 삶을 돌아보게 된다.

충격과 슬픔은 항상 남은 이들이 치러내야 하는 과제로 남게 되고 그 또한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히며 일상을 이어나가게 된다.


영원이라 생각했던 많은 순간들은 법칙처럼 영원이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나게 된다. 죽음도 그 종류 중의 하나이다.

일상은 삶과 죽음이 밀접하게 혼재되어 끝없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이토록 가깝다는 것을 부고를 접할 때마다 깨닫는다.


나는 아직 구체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죽음이 가깝다고 한 들 그에 대한 언급 자체가 무섭고 두려워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다.

하지만 축하 보다 위로할 일이 많은 나이가 된 지금 죽음 앞에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나 고민하게 되는 건 사실이다.

우습게도 그 고민의 답은 언제나 대충 살자로 정리된다.

대충 못 살겠어도 그 순간만큼은 즉 모두에게 평등한 죽음 앞에서만은 좋고 나쁜 것이 하나같이 무의미 해진다.

허무와 무상이 앞에서는 늘 대충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죽음이 잊혀질 때 쯤이면 그 마음도 잊혀지곤 한다.


하지만 누가 그랬다.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평생이라고...


죽음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듯 무엇이 정답인지 명답인지는 영원히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