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염색하러 갔다 인생 썰을 듣고 왔다.
나는 주기적으로 새치 염색을 하는 중년이다. 흰머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른 나이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흰머리는 한해 한해 그 영역을 빠르게 넓혀갔다. 머리카락이 뿌리부터 하얗게 반짝이는 시기는 '돌아서면'이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셀프 염색으로 흰머리를 덮는 묘수를 부리다 한계에 다다르면 미용실을 찾게 된다.
때마침 설이 다가왔다. 설 명절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사람 심리가 그렇잖느가? 설빔을 사 입듯 설에는 뭔가 해야 할 것 같았다.
설 전날 그날!! 염색을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꼭 미용실에서 하고야 말겠다는 고집에 가까운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늘 염색을 하러 가는 미용실은 휴무였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봤지만 휴무 아님 예약이 다 차 단순 뿌리 염색이라도 할 곳이 없었다.
무작정 차를 몰고 나가 동네 그리고 옆 동네 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역시 무모한 사람이었다. 구석구석 작은 로컬 미용실은 문을 열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하나 같이 설날 휴무 종이가 입구에 붙어 있었다.
일부러 머리도 안 감고 나왔는데 다시 집으로 가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화려한 핑크 간판 옆에 미용실 영업을 알리는 회전등이 돌아가는 게 보였다.
김뿌염 헤어
오늘 내 구원은 바로 저곳이구나...
나는 김뿌염 헤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미 염색약을 머리에 잔뜩 묻힌 아줌마 한 분이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옆자리로 안내받았다. 그리고 뿌리 염색을 하겠다고 말하며 떡진 머리를 풀어헤쳤다.
"흰머리도 없구먼."
옆자리의 60대 아줌마였다.
느낌이 안 좋았다. 옆자리 아줌마는 내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나는 오늘 너와 이야기 나누고 싶어.'라는 뜻을 전해 오는 것 같았다.
미용실에서 여자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뉜다.
입을 털며 우쭐을 겸비한 TMI를 늘어놓는 사람과 마치 꿀을 발라 놓은 듯 입도 벙긋도 하지 않는 사람
나는 후자이다. 그리고 옆자리 아줌마는 전자였다. 아줌마는 자신의 흰머리 썰을 처음 보는 내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입으로 살을 풀듯 자신이 염색을 하게 된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살면서 종종 이런 상황에 놓인다. 누구든 이런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원치 않는 대화를 처음 보는 사람과 이어 나가야 하는 상황말이다.
"저도 그래요. 유전으로 흰머리가 많아요. 염색하는 거 정말 귀찮아요."
그 맞장구는 아줌마라는 고기에 물을 부어 준 격이었다. 아줌마는 아버지 쪽 유전, 반짝이는 은색머리를 기를지 고민 중, 다른 미용실 원장님의 의견 등등을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야기는 챕터 2로 이어지며 자신의 봉사 활동과 배움에 관련된 이야기까지 쏟아 내기 시작했다.
나는 김뿌염 원장님이 저 여인을 빨리 샴푸실로 데려 가 주길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아줌마의 입김에 내 머리 염색약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렇죠', '맞아요' 하는 나의 추임새조차 지쳐갈 때쯤 아줌마는 샴푸실로 불려 갔다. 가면서도 "이제 더 이상 뭘 배우는 건 안 하고 싶어."라는 장렬한 한 마디를 남겼다.
아줌마가 샴푸 후 머리를 말리고 나 역시 샴푸실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아줌마의 일방적 대화는 대장정을 마쳤다.
아줌마는 자신의 인생썰을 한 시간 요약본 노잼 드라마처럼 내게 소개해 주었다.
나는 너무나 싫었지만 맞장구를 치며 내 에너지를 몽땅 소진하고 미용실을 나왔다.
그때 맞장구를 치지 않았다면 염색하는 내내 좀 더 편했을까? 그렇다고 말을 걸어오는데 무시할 수도 없잖아!!